公諱錫字天賚姓晉氏南原人高麗顯宗朝戶部尙書兼左右僕射諱含祚寔爲鼻祖至後世諱光仁 明宗朝殿中侍御史卽公之考也南原邑誌曰蛟龍山下金崗洞有玉井一童女適至井邊見童子乘玉片出遊井中潛伺執手以歸作夫婦爲土着晉氏之先其後孫光仁子錫 高宗朝討契丹大捷有偉績封南原君其家乘云公自號睡隱隱德不仕 高宗時無歲不被蒙遼兵而公智謀出人高宗使元師金良鏡屢勸出仕公終不起時契丹以四十萬兵入寇高宗使司空趙冲傳諭曰卿之家世襲忠貞爲國家捍危濟艱者多矣今契丹大擧入寇社稷之危迫在朝夕卿若不下箕山之節則寡人當效漢昭烈三顧之義於是公杖蘿卽起與金良鏡討契丹大捷凱還之日卽封南原君蓋公之功德旣厚後祿宜遠裔孫諱如蘭仕 高麗末珍原監務自此四傳諱璧以承旨退居南原之池塘村子姓綿綿僅傳而各派猶未免零丁源湥流遠者不必驗也噫今在異代玄玄之下公之事文獻莫徵而幸有此邑誌家乘二條流傳承旨公旁八世孫得明甫恐其愈久愈失議於諸宗以爲傳後計記二條來請佘作文甚懇余亦承旨公之外裔不得以不文辭謹按邑誌與家乘皆可信實蹟而但生卒年配位及墓所無處可考只據二條所記潤色而立傳焉
崇禎戊辰冬 外裔通訓大夫行司憲府掌令蔚山 金壽祖 謹撰
남원군의 전
공의 휘는 석(錫)이요 자는 천뢰(天賚)이며 성은 진씨(晉氏)니 남원인(南原人)이다. 고려 현종조(顯宗朝)에서 호부상서 겸 자우복야의 관직을 지낸 휘 함조(含祚)가 있는데 이 어른이 비조(鼻祖:시조를 말함)가 된다. 후세에 이르러 휘 광인(光仁)이 명종조(明宗朝)에서 전중시어사를 하였으니 이 어른이 즉 공의 아버님이시다. 남원 읍지(邑誌)에 말하기를 「교룡산 아래 금강동(金岡洞)에 옥정(玉井)이 있었는데 동녀(童女) 하나가 마침 옥정가에 갔다가 동자(童子)가 옥편(玉片)을 타고 우물 가운데 나와서 노는 것을 보고 숨어서 엿보다가 그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와 부부(夫婦)가 되어 토착(土着)한 진씨의 선조가 되었다. 그의 후손 광인의 아들 석(錫)이 고종조(高宗朝)때 거란(契丹)을 토벌하며 크게 승리하고 위대한 업적이 있어서 남원군을 봉하였다.」라고 하였다. 그 가승(家乘)에 이르기를 공이 스스로 호를 수은(睡隱)이라 하고 덕을 숨기어 벼슬을 아니하였다. 고종 때 해마다 요병(遼兵)의 난리를 당하지 않을 때가 없었다. 공의 지혜와 모략이 뛰어나 고종이 원수(元帥) 김양경(金良鏡)으로 하여금 나와서 벼슬하기를 여러 번 권하였으나 공이 마침내 일어나지 아니하였다. 이 때 거란이 40萬의 병대를 이끌고 국경에 들어와 도적질 하거늘 고종이 사공(司空) 조충(趙冲)으로 하여금 교유(敎諭)를 전하여 가로되 「경의 집안이 대대로 충정(忠貞)을 이어 나라의 위태함을 막고 어려움을 구한 것이 많았다. 지금 거란이 크게 군사를 이끌고 들어와 도적질하므로 사직(社稷)의 위박(危迫)함이 조석에 있다. 경이 만약 기산(箕山:중국(中國) 하남성(河南省)에 있는 山의 이름이니 요(堯)임금 때 허유(許由)와 소부(巢父)가 은거하던 곳)의 절개를 버리지 아니하면 과인(寡人:임금의 자칭(自稱)이니 덕이 적은 사람이라는 뜻)이 마땅히 한소열(漢昭烈)의 삼고초려(三顧草廬:한(漢)나라 유비(劉備)가 소열황제(昭烈皇帝)니 일찍이 남양융중(南陽蕯中)에 제갈공명(諸葛孔明)을 세 번 찾아가 공명(孔明)으로 하여금 나오게 한 것을 말함)하던 의리를 본받을 것이다.」 하니 이에 공이 칼을 집고 즉시 일어나 김양경과 더불어 거란을 토벌하여 크게 승리를 하였는데 개선(凱旋)하는 날 즉시 남원군을 봉하였다.
대개 공의 공덕(功德)이 이미 두터우니 후록(後祿)이 마땅히 멀리 미칠 것이다. 후손의 휘 여란(如蘭)이 고려 말엽에 벼슬하여 진원감무(珍原監務:감무는 조선의 현감과 같은 것)가 되었고 이로부터 四대를 전하여 휘 벽(璧)이 승지로서 남원 지당촌(南原池塘村)에 물러가 살았는데 자손이 면연(綿綿)하게 겨우 전하였고 각 파(各派)가 오히려 영정(零丁:자손(子孫)이 쇠체(衰替)하다는 말)함을 면치 못하니 근원이 깊으면 흐름이 멀다는 말도 꼭 맞는 말이 아닌 듯하다.
아! 지금 다른 세대에 있어 현현지하(玄玄之下:아득히 먼 세대(世代) 아래란 말)에서 공의 사적을 고징할 문헌이 없더니 다행히 이 읍지와 가승의 두 조항이 있어서 유전하여 왔다. 승지공의 八세 방손 득명(得明)이 더욱 오래 갈수록 더욱 실전될 것을 두려워하여 모든 종인(宗人)과 의론 끝에 후세에 전할 계획을 하고 이조(二條:읍지 가승)를 기록해 가지고 와서 나에게 글을 청하기를 심히 간곡하게 하였다. 나 또한 승지공의 외예(外裔:외손(外孫)의 후손)이니 글을 못한다는 것으로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읍지와 가승을 상고하여 보니 다 가히 믿을 만한 실적(實蹟)이나 다만 출생하고 사망한 연월과 배위(配位) 및 묘소는 상고할 곳이 없으므로 다만 이조(二條)의 기록한 것에 의거하여 윤색(潤色:글을 잘 만드는 것을 말함)하여 가지고 입전(立傳)하노라.
숭정 무진년(단기 4141년) 겨울에
외예 통훈대부 행 사헌부 장령 울산 김수조(金壽祖)는 삼가 찬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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