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

 

文庵公行狀 문암공 행장

 

公諱嵩字卿命號文庵姓晉氏系出南原高麗戶部尙書謚文敬公諱含祚其鼻祖也其後有諱錫討契丹有勳封南原君有諱孝純文科禮部尙書皆其顯祖也曾祖諱英佐奉翊大夫典工尙書祖諱成乙三重大匡門下評理考諱淑僉正安義縣監妣淑夫人開城王氏公以壬寅二月十二日生天姿英異幼不嗜學放過就傳之年年十三遭縣監公憂居喪凡節自合情文讀禮之暇讀聖賢書潛究力賾及朞己能通解旨義藻辭大進見者以遠大期之丙申  太宗登文科行學諭學祿己亥丁內艱哀毁成疾幾不能支及葬之日公强病隨轝弔者言其傷孝使之在家調護公號泣曰不孝獲戾罪苦酷罰猶望生全乎遂匍匐扶柩而行達于葬所哭泣不絶凡樹襄封築之節皆躬自點檢無一事不恔於心葬畢廬墓終制服闋上京遷博士壬寅拜承文院檢校又拜禮曹佐郞有以公孝行聞者上特加嘉奬焉時金佔畢宗直禍作善類殳夷公奮然抗辯少無顧忌時論偉之丙午秋除濟州牧使濟州在海島中遠王都數千里王化不及民俗붇悍號稱難治公於到任之初先恩後威前日之붇悍頑蠢者莫不感悅州遂大治秩滿將歸島民扶老携幼願留者相屬於道至有泣下者矣今以其所存遺唾考之則義理詳明軆裁嚴正公之言儘自知甚明矣尹相與公久同臺憲契好甚密及尹相爲秋曹長官公一未嘗私往求見非公事則不屑屑焉及退而居家山巾野服蕭然若寒士與偕於村翁野叟之間不見其崖異而經歷宦達亳魚置諸心奉先以誠孝敎子以謹敕有時友朋至則必酌酒暢懷評史談文藹然有款曲之意癸酉七月八日寢疾方其革也呼子孫在側戒之以謹守家法勿負忠孝等語仍正席翛然而逝享年六十二同年九月五日奉窆于府東大成山東麓酉坐之原葬用松脂從遺命也公娶靈光柳氏僉正洽女有婦德生一男宗沃成均進士宗沃男后昌訓鍊院主簿曾玄以下不盡錄於乎公以正大剛毅之質加淸高篤守之志立朝數十年直道以行未嘗有依附苟簡之態至今四百餘年後慕公者猶頌之不己其視顯其位而損其德者果何如也所著有朝天錄一篇而屢經兵燹餘者無多可恨也己後孫諸氏懼夫久而愈泯收拾家傳遺事請佘爲狀不佞蓋嘗有曠世執鞭之願者久窃以托名爲榮遂不揆僭越而撰次之如上以俟他日立言之君子云爾

  癸酉小春節    嘉善大夫宗正院卿全州李明翊謹狀

 

문암공의 행장

공의 휘는 숭(嵩)이요, 자는 경명(卿命)이며 호는 문암(文庵)이니 성(姓)은 진씨(晉氏)로서 세계(世系)가 남원에서 나왔으니 고려 호부상서 시호 문경공 휘 함조(含祚)가 그의 시조이다. 그 뒤에 휘 석(錫)이란 어른이 있어 거란을 토벌하여 공훈이 있어 남원군을 봉하였다. 휘 효순(孝純)은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관직이 예부상서이니 다 그의 현조(顯祖)이다. 증조의 휘는 영좌(英佐)이니 봉익대부 전공 상서이고 조(祖)의 휘는 성을(成乙)이니 삼중대광 문하평리이며 아버님의 휘는 숙(淑)이니 첨정 안의 현감이고 어머님 숙부인은 개성 왕씨(王氏)다. 공이 임인년 2월 12일에 출생하니 하늘에서 타고난 자품이 영특하고 기이하였다. 어릴 적에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아 취부지년(就傅之年:8세(八歲)를 말한 것)을 그냥 지나갔다. 나이 13에 현감공의 상사를 만나 거상범절(居喪凡節)이 스스로 정리와 예문에 합하였고 예(禮)를 습독(習讀)한 여가에 성현(聖賢)의 글을 읽어 깊이 연구하고 힘써 책임져서 1년 만에 이미 그 뜻과 의리를 능히 통하여 문사(文辭)가 크게 진보하니 보는 사람들이 원대(遠大)하게 기대하였다. 병신년에 이르러 태종조(太宗朝)에서 문과(文科)에 올라 학유와 학록을 지냈고 기해년에 내간상을 당하여 애훼(哀毁)로 병이 되어 능히 지탱하지 못하게 되었는데 장례 모시는 날에 미쳐서 병을 무릅쓰고 상여를 따라가니 조문하는 사람들이 그 상효(傷孝:상중에 슬퍼서 죽는 것)를 염려하여 집에 있으면서 조리하여 보호하게 하니 공이 부르짖어 울면서 말하기를 불효로 죄를 얻었으니 혹벌을 당함이 마땅하거늘 오히려 살아서 온전하기를 바라겠는가 하고 드디어 관을 붙들고 기어서 행하여 장소(葬所)에 도달해서도 곡읍(哭泣)이 그치지 아니하였다. 무릇 심고 뽑으며 봉하고 쌓는 절차를 다 몸소 점검(點檢)하여 한 가지 일이라도 마음에 부족한 것이 없게 하였다. 장례를 필하고 여묘(廬墓)에 살아 상제(喪制)를 마치었으며 상복을 벗은 뒤에 상경하여 박사로 천직(遷職)하였다. 임인년에 승문원 검교로 제수되었고 또 예조좌랑에 제수되었다. 공의 효행을 아뢴 사람이 있어서 주상(主上)께서 특별히 더욱 아름답게 여기시어 장여하시었다. 이 때 김점필재 종직(宗直)에게 화(禍)가 일어나 선유(善類)가 다 죽게 되니 공이 분연(奮然)히 항변(抗辨)하여 조금도 돌아보고 꺼리는 바가 없으니 그 시대 여론이 훌륭하게 여기었다. 병오년 가을에 제주목사로 제수되었다. 제주는 해도 중(海島中)에 있고 왕도(王都:王이 계신 도성(都城)이란 말)와는 수천 리가 멀고 왕화(王化:王의 교화(敎化))가 미치지 못했던 탓으로 백성의 풍속이 강하고 사나워 다스리기 어려 운 땅이라고 호칭(號稱)하였다. 공이 도임하는 첫날부터 먼저 은혜를 베풀고 뒤에 위엄으로 다스리니 전일의 강하고 사나운 자와 어리석고 꿈틀거리는 자들이 다 기뻐하지 아니하는 자가 없어서 드디어 크게 다스려졌다. 만기가 되어 장차 돌아오려는데 섬 백성들이 늙은이를 붙들고 어린아이를 다리고 와서 더 머물러 주기를 원하는 자들이 길에 서로 연하였고 눈물 흘리며 우는 자도 있었다. 지금 그의 존재(存在)한 시문(詩文)을 상고해 보면 의리가 자상하고 분명하며 체재(體裁)가 엄숙하고 정대하니 공의 말씀이 진실로 스스로 아는데 있어서 심히 명확하였다. 윤상(尹相:尹정승이란 말)이 공과 더불어 오랫동안 대헌(臺憲:사헌부(司憲府)를 말한 것)에 같이 있었으므로 그 정리가 심히 친밀하였는데 윤상이 형조판서가 되어서는 공이 한 번도 사사로이 가서 만나보기를 구하지 아니하였고 공사(公事)가 아니면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으나 퇴거하여 집에 있게 되어서는 산건야복(山巾野服)으로 소연(蕭然)한 한사(寒士)같이 촌 늙은이 사이에서 더불어 같이 지내면서 그 애이(崖異:지위(地位)가 다른 것)를 보이지 아니하여 경력(經歷)과 환달(宦達)은 터럭 끝만큼도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다. 선조를 받들되 정성과 효도로 하고 자제를 가르치되 근검과 신칙(愼飭)으로 하였으며 때로 벗이 찾아오면 반드시 술을 권하고 회포를 화창하게 하며 역사를 평론하고 문학을 담화하여 애연(藹然)하게 관곡한 뜻이 있었다. 계유년 7월 8일에 병환이 바야흐로 위급하니 자손을 불러 곁에 있게 하고 가법(家法)을 삼가 지키어 충효를 저버리지 말라는 말씀으로 경계하였다. 인해 자리를 바르게 하고 훌연(翛然)히 저 세상으로 가시니 향년이 62이다. 같은 해 9월 5일에 부(府) 동쪽 대성산 동록(東麓) 유좌로 된 언덕에 봉폄(奉窆)하였는데 장례에 송지(松脂)를 쓴 것은 유명(遺命)을 좇은 것이다. 공이 영광 류씨(柳氏)를 취(娶)하였으니 첨정 흡(洽)의 따님인데 부덕(婦德)이 있었다. 1남 종옥(宗沃)을 낳았으니 성균진사요, 종옥의 아들 후창(后昌)은 훈련원 주부이다. 증현손(曾玄孫)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아니한다.

아! 공이 정대강의(正大剛毅)한 자질로 청고독수(淸高篤守)한 뜻을 더 겸하여 조정에 있은 지 수십 년 동안 직도(直道)를 행하여 일찍이 의지하여 붙이고 구차하게 구하는 태도가 있지 아니해서 지금 4百여 년 뒤에 와서도 공을 사모하는 자가 오히려 청송하여 말지 아니하니 그 지위는 현달하였으나 그 덕이 손실된 자와 더불어 비교해 본다면 과연 어떠하겠는가. 저술한 바는 조천록(朝天錄) 일편(一篇)이 있었는데 여러 번 병선(兵燹)을 겪어 남아 있는 것이 많지 못하니 가히 한이 된다. 후손 여러분이 오래갈수록 더욱 민멸될 것을 두려워하여 집에서 전해오는 유사(遺事)를 수습해 가지고 나에게 행장을 해달라고 청하였다. 영리하지 못한 내가 일찍이 오래된 세대에서 집편지원(執鞭之願)이 있은 지가 오래되었다. 그윽히 이름을 의탁하는 것으로 영광스럽게 여기어 참람함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위와 같이 찬차(撰次)하여 타일의 입언군자(立言君子)를 기다리노라.

  계유(1933)년 10월 일에

    가선대부 종정원경 전주 이명익(李明翊)은 삼가 장(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