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

 

永慕齋公行狀 영모재공 행장

 

公諱起福字德膺南原人始祖諱含祚仕高麗  顯宗朝官至尙書左僕射後世諱光仁爲殿中侍御史御史生諱錫  高宗朝與金良鏡討契丹有功事載麗史及慕齋金公集其後簪纓相承綿綿不絶入我  朝有軍資判官諱自康啓功郞諱京童從仕郞諱碩佐承仕郞諱繼楊卽公之高曾祖考也妣江陵金氏司藝士銛之女叅奉應斗之孫執義效侃之曾孫也公以甲辰三月二十日生于周浦池塘里幼有異質言談擧止儼若成人年纔五歲于外艱顔色之慽哭泣之哀感動鄰里見者莫不嗟異焉及長自知爲學之方居家飭躬嚴有規度事母夫人色養備至甘旨之供藥餌之節靡不用極非有事故來嘗須曳離側婾色婉容一以承順爲事焉及其母夫人之下世如哀毁逾禮啜粥疏食以終三年雖祈寒盛暑不脫衰絰殯窆祭奠之節一遵文公家禮之文處昆季湛樂無間與其弟叅奉公起禎從弟叅奉公  起祥同居一室講磨切磋每於佳辰令節杖屨逍遙於南阡北陌之間和氣溢發於一觴一咏之際宗族之貧窮而不能自存者鄉隣之㷀獨而無所依歸者則曰於我乎處賙恤保愛曲有恩義蓋亦孝友之所推及也晚構一室于先塋之下扁以永慕晨昏拜墓出入必告不以風雪而或弛嗚呼公可謂終身而慕者歟公身不出戶庭而  朝廷士大夫聞風交譽薦除宣陵叅奉暫到京師卽歸鄉里竞杜門以終卽癸丑九月初八日也配安東權氏叅奉苞之女事君子無違德先公九年而卒墓在竹谷瓦山玄坐之原與公同塋矣有一子享升成均生員聚扶安韓氏大胤女生五男二女男長用賓次英賓次秀賓次可賓次光賓女徐後積蘇莢內外後孫摠略干人於戱今去公二百餘年而其孝於親友於兄弟睦婣之行任恤之義固是吾鄉先丈老之所傳誦而不佞亦耳熟焉實有高山仰止之思其後孫翼明袖公遺事謁佘以狀德之文曰吾先祖嘉言懿行實有不可泯者而世代綿遠且經兵燹母可徵信文字願得公一言以眎來許也余以人微文拙累辭不獲則窃有感於吾夫子樂道人善之訓遂略記其梗槩如上以俟夫他日立言之君子云爾

  崇禎一八○九  己巳春      通政大夫行司諫院正言浪州金圭夏撰

 

영모재공의 행장

공의 휘는 기복(起福)이요 자는 덕응(德膺)이며 남원인(南原人)이니 시조 휘 함조(含祚)는 고려 현종조(顯宗朝)에서 벼슬하여 관직이 상서 좌복야에 이르렀다. 후세에 이르러 휘 광인(光仁)이 전중시어사가 되었고 어사가 휘 석(錫)을 낳았으니 고종조(高宗朝)에서 김양경(金良鏡)과 더불어 거란을 토벌하여 공이 있었는데 그 사적이 고려사 및 모재김공(慕齋金公) 문집에 실려 있다. 그 뒤에 관직을 서로 이어 면면(綿綿)히 끊이지 아니하였다. 우리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와 군자판관 휘 자강(自康)과 계공랑 휘 경동(京童)과 종사랑 휘 석좌(碩佐)와 승사랑 휘 계양(繼楊)은 즉 공의 고조 증조 조부와 아버님이시다. 어머님은 강릉 김씨(金氏)니 사예 괄(銛)의 따님이요 참봉 응두(應斗)의 손녀이며 집의 효간(効侃)의 증손이다. 공이 갑진년 3월 20일에 주포 지당리(周浦池唐里)에서 출생하여 어릴 적부터 특별히 남다른 자질이 있어 언담(言談) 거지(擧止)가 엄연한 것이 성인과 같았다. 나이 겨우 다섯 살에 외간상(外艱喪:아버님의 죽음)을 만났는데 얼굴의 수척함과 곡읍(哭泣)의 애통함은 이웃과 마을 사람을 감동하게 해서 보는 사람이 그 보통아이와 다른 것을 찬탄하지 아니하는 자가 없었다. 장성하기에 미쳐서는 스스로 학문을 하는 방법을 알았다. 가정에 있어서는 몸가짐을 조심하여 엄한 규도(規度)가 있었고 모부인(母夫人)을 섬기는데 색양(色養:얼굴빛을 공손하고 온화하게 부모를 받드는 것)을 갖추어 지극히 하였고 맛있는 음식으로 받드는 것과 약이(藥餌)를 드리는 절차를 극진하게 아니함이 없었고 사고(事故)가 있지 아니하면 일찍이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고 화락한 안색과 공손한 용모로 한결같이 뜻을 받드는 것으로 일을 하였다. 모부인이 하세(下世:죽는 것을 말한 것)하기에 미쳐서는 애훼(哀毁)하기를 예절에 지나쳐 죽을 먹고 나물을 씹어 3년상을 마쳤는데 비록 혹독한 추위와 극심한 더위에도 최질(衰絰:최복과 수질(首絰) 요질(腰絰)이니 즉 상복이다)을 벗지 않고 빈소와 장례와 제(祭)와 전(奠)을 올리는데 있어서 주문공(朱文公:송(宋)나라 대유학가(大儒學家)인 주희(朱熹)의 시호가 문공(文公)이다)의 가례(家禮)를 한결같이 준행하였다. 형제간에 있어서는 서로 간격없이 담락(湛樂)하여 그의 아우 참봉공 기정(起禎)과 종제(從弟) 참봉공 기상(起祥)과 더불어 한집에 동거하면서 학문을 강마(講磨)하고 절차(切磋)하며 매양 가진영절(佳辰令節)에 지팡이와 나막산으로 남천북백(南阡北陌) 사이에서 소요(逍遙:거니는 것)하면서 애애한 화기(和氣)가 술 한잔 마시고 시 한수 읊는 즈음에서 넘쳐 발하였다. 종족 중에 빈궁해서 능히 스스로 보존하지 못하는 자와 향인(鄉隣) 중에 경독(煢獨:홀로 외로운 것)해서 의탁할 곳이 없는 자에게는 나에게로 와있게 하여 조휼(賙恤)하고 보애(保愛)해서 곡진한 은정이 있었으니 대개 이것 또한 효우지심(孝友之心)을 미루어 행한 것이다. 만년에 선영(先塋) 아래 집 하나를 지어 영모(永慕)라고 편액(扁額)을 하고 새벽과 저녁으로 묘소에 참배하고 나가고 들어옴을 반드시 고하여 풍설(風雪)이 심해도 혹 해이(解弛)하지 아니하였다.

아! 공은 몸이 마치도록 부모를 사모하는 사람이라고 가히 이르겠도다. 공은 몸이 호정(戶庭)을 나가지 아니하였음에도 조정 사대부가 소문을 듣고 서로 칭찬하며 추천해서 선릉(宣陵:성종대왕(成宗大王)의 후비(後妃) 정순윤씨(貞順尹氏)의 능(陵)) 참봉을 제수하였는데 잠시 서울에 왔다가 즉시 고향으로 돌아가 마침내 두문불출(杜門不出)하다가 세상을 마치니 즉 계축년 9월 초8일이다. 배위 안동권씨는 참봉 포(苞)의 따님이니 군자(君子:부군(夫君)을 말한 것)를 섬기는데 부덕에 어그러짐이 없었다. 공보다 9년을 먼저 돌아갔고 묘는 죽곡 와산(竹谷瓦山) 해좌로 된 언덕에 있으니 공과 더불어 무덤을 같이 하였다. 1자 형승(亨升)이 있으니 성균생원인데 부안 한씨(韓氏) 대윤(大胤)의 따님을 취하여 5남 2녀를 낳았으니 장남은 용빈(用賓)이고 차남은 영빈(英賓)이며 3남은 수빈(秀賓)이고 4남은 가빈(可賓)이며 5남은 광빈(光賓)이고 여서는 서후적(徐後積)과 소협(蘇夾)이니 내외 후손이 총 약간(若干)이 있다.

아! 지금 공의 시대의 거리가 2百여 년이 되었는데 그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한 것과 친척간에 화목한 행동과 궁빈(窮貧)한 사람을 구휼한 의리는 진실로 우리 고향의 옛날 어른들이 전송(傳誦)해 와서 나 또한 익히 들었으므로 고산(高山)같이 경앙(景仰)하는 생각이 있었다. 그의 후손 익명(翼明)이 공의 유사(遺事)를 가지고 와서 나에게 장덕지문(狀德之文:행덕(行德)을 기록한 글이란 것)을 부탁하면서 말하기를 「우리 선조의 가언의행(嘉言懿行:아름다운 말씀과 참한 행실이란 말)은 가히 민멸해서는 아니될 것이 있었는데 세대가 오래되고 또 병란(兵亂)을 겪어 가히 징신(徵信)할 문자가 없으니 원컨대 공의 일언(一言)을 얻어 오는 세상 자손들에게 보이려 합니다.」 하였다. 내가 사람은 한미하고 문사는 졸렬한 것으로 사양하였으나 얻지 못하였은즉 우리 부자(夫子:공자를 말한 것)의 「사람의 착한 것을 즐거이 말하라.」는 교훈에 느낀 바 있어 드디어 그 대개(大槩)를 위와 같이 간략히 기록하여 타일(他日)의 입언군자(立言君子:사람의 선행(善行)을 찬술(撰述)하는 군자(君子)라는 말)를 기다리노라.

  숭정 4기사(1809)년 봄에

    통정대부 행 사간원 정언 낭주 김규하(浪州金圭夏)는 삼가 찬술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