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

 

敬齋公行狀 경재공 행장

 

公諱榮進字勇之號敬齋姓晉氏其先南原人也高麗戶部尙書左右僕射文敬公諱含祚寔爲鼻祖其後有諱錫以戰功封南原君七世有諱嵩文科濟州牧使高祖諱胤賢曾祖諱聖重祖諱道鼎考諱德海俱隱不仕妣咸陽吳氏公以  肅廟甲子七月七日生姿性넉悟端方自幼不喜遊嬉不妄語言及長好讀聖賢書常置身硯北終日覃思窮究其旨義尤著力於主敬工夫以謝上蔡惺惺法爲軆驗之頂針其名齋之義蓋爲常目地也恒居端拱危坐望之儼然人不敢以褻狎之態加之語黙有度步履安詳雖在急遽倉猝之際罔或有失文章乃其餘事而皆懋實刊華詩亦平談雅正本之性情瀉其襟韻湥得三百篇遺意是以同時名碩無不下幡僕僕平生絶無進取之意於世間名利泊如也常以安分身無辱知機心自閒十箇字書諸座右以資觀省晚年築精舍於所居之傍庭除手植皆歲寒之友或興到意至則逍遙盤桓以自遣又作同堂異室之制聚族團樂兼爲子弟隷業之所其規模制度皆如此寢疾招子姪在傍諭之以勤於學問窮不失義無忝所生等語一亳不及於殖貨營產之方公可謂遣之以安善爲子孫計者矣越幾日乃屬纊享年六十一用踰月之制葬于雲峯之德山村中麓艮坐配江陵金氏同原異壙有一男範疇範疇一男龍采曾玄皆不錄公以近道之資加特敬之工積一生修爲無非做人樣子而踐履之篤方之古人亦未多得惜乎其不能施之當世枯䤋以終也其所著詩集略于及天命圖說一部蓋公精力之所在云謹狀

  癸酉小春上澣      嘉善大夫掌禮院少卿原任奎章閣副提學延安李炳觀謹撰

 

경재공의 행장

공의 휘는 영진(榮進)이요 자는 용지(勇之)며 호는 경재(敬齋)니 성은 진씨(晉氏)인데 그 선조는 남원인(南原人)이다. 고려 호부상서 좌우복야 문경공 휘 함조(含祚)가 비조(鼻祖)가 되고 그 뒤에 휘 석(錫)이 전공(戰功)으로 남원군에 봉작(封爵)되었다. 七世에 휘 숭(嵩)이 있으니 문과 급제하여 제주목사를 하였고 고조의 휘는 윤현(胤賢)이요 증조의 휘는 성중(聖重)이며 조의 휘는 도정(道鼎)이요 고(考)의 휘는 덕해(德海)니 다함께 숨어 살면서 벼슬을 아니하였다. 비(妣)는 함양오씨이다. 공이 숙묘(肅廟) 갑자(단기 4017)년 7월 7일에 출생하였으니 자성(姿性)이 영리하고 단정하였으며 유희(遊嬉)를 좋아하지 않았고 언어를 망령되게 아니하였다. 장성해서는 성현의 서적 읽기를 좋아하고 몸이 항상 벼루가에 있으면서 날이 다하도록 깊이 생각하여 그 지의(旨義)를 연구하였으며 더욱 주경(主敬) 공부에 힘을 써서 사상채(謝上菜:송(宋)나라 유학자(儒學者))의 성성법(惺惺法:상채어록(上蔡語錄)에 경시상 성성법(敬是常惺惺法)이란 말이 있는데 성성(惺惺)은 영리한 모양을 말한 것)으로 체험해서 재(齋)를 이름한 의리로 정침(頂針:이마에 침을 놓아 깨우친다는 것)을 삼으니 대개 항상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항상 거처하기를 단정히 손 곶고 무릎 꿇고 앉아 엄연하게 보이어 사람들이 감히 설압(褻狎:음란한 말로 가까이 하는 것)하는 태도로 대하지 못하였으며 어묵(語黙)에 법도가 있었고 보리(步履:걸음걸이)가 안상(安詳)하여 비록 창급한 즈음에 있더라도 혹 실수가 없었다. 문장은 그의 나머지 일이었으나 다 진실을 힘쓰고 외화(外華)를 버리었으며 시(詩) 또한 평탄한 말로 단아하고 정직하게 하여 성정(性情)을 근본으로 하고 금운(襟韻)을 씻어 시 삼백 편(詩三百篇)의 유의(遺意)를 깊이 얻었다. 이러므로 써 같은 시대의 명인석사(名人碩士)가 승복하지 아니하는 자가 없었다. 평생에 영화를 진취(進取)할 뜻이 없어 세간명리(世間名利)에 마음이 담박하였고 항상 「분수를 편안히 지키면 몸에 욕됨이 없고[安分身無辱] 기틀을 알면 마음이 스스로 한가하다[知機心自閑].」이라는 두 귀절을 좌우(座右)에 써놓고 보고 반성하는 자료로 하였다. 만년에 거주지 곁에 정사(精舍)를 짓고 뜰 가에 손수 심은 것은 다 세한지우(歲寒之友:소나무를 말한 것)니 혹 흥이 이르고 뜻이 생기면 왔다 갔다 어루만지면서 스스로 시간을 보내었다. 또 동당이실(同堂異室)의 제도를 만들어 종족을 모아 단락하게 지내고 겸하여 자제들의 공부하는 장소로 하였으니 그 규모와 제도가 다 이 같았다. 병환이 위중하니 자질들을 불러 곁에 있게 하고 학문을 부지런히 하여 빈궁해도 의리를 잃지 말아 너희들을 낳은 선인들을 더럽히지 말라는 말씀으로 타이르시고 일호(一毫)라도 재물을 번식(繁殖)하고 산업을 경영하는 방법은 언급하지 않았으니 공은 편안한 방법을 끼쳐 주어 자손을 위하는 계획을 잘하였다고 가히 이르겠다. 며칠 지나 세상을 마치니 향년이 61이다. 유월지제(踰月之制:士는 유월이장(踰月而葬)이라고 하여 달을 넘기어 장례를 지냄)를 써서 운봉(雲峯)의 덕산촌 중록(德山村中麓) 간좌에 장례 모시었다. 배위는 광릉김씨니 같은 언덕에 광(壙)을 달리하였다. 1남 범주(範疇)가 있고 범주의 1남은 용채(龍采)이다. 증손 현손은 기록하지 아니한다.

공이 도에 가까운 자질로 특경지공(特敬之工)을 더해서 일생의 닦고 행한 것이 주인양자(做人樣子:사람을 사람으로 만드는 것)가 아님이 없어서 그 실천 이행의 독실한 것은 고인(古人)에게 비유해도 역시 많지 아니한데 아깝게도 당세에 시용(施用)하지 못하고 고역(枯䤋:영화를 누리지 못하고 몸이 마르고 낯빛이 누렇다는 것)으로 써 마치었다. 그의 저술한 시집(詩集) 약간과 천명도설(天命圖説) 일부는 대개 공의 정력이 모이어 있는 곳이다.

  계유(1933)년 10월 상순에

    가선대부 장례원 소경 규장각 부제학            

    연안 이병관(李炳觀)은 삼가 찬술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