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

 

庸齋公行狀 용재공 행장

 

公諱時和字時叔號庸齋晉氏先出自南原南原君諱錫之后濟州牧使諱嵩十一世孫訓鍊院注簿后昌十世孫五世祖諱榮進高祖諱範疇曾祖諱龍采祖諱大有考諱壽鳳戶曹叅判妣貞夫人金海金氏以丙寅三月五日生公公生有異質自幼異凡兒性嗜學家貧雖不能專意讀書而事親餘力則必從師問業兄弟之間物無爾我遭父母喪皆如禮終三年每月朔望必省哭于墓遇娣妹極厚常常親往餽遺待族黨以敦睦尤著力於敎子姪擇師授學不以家計淸寒而有所放過晚年益自收歛身必日對方冊以卷中人爲尙友以之成德屹然爲家門之模楷棟樑矣不幸寢疾呻吟數載而猶不廢看書子姪輩或以損傷神精諫勿之公曰以此忘病何損之有乎己未四月七日皐于寢享年五十四  贈通政大夫司僕寺正葬在南原東白波五柳洞負丑原配溆夫人密陽朴氏同壙有子男四人成仁成義成禮成智孫男摠略干人公以聰明溫雅之資加勤苦篤勵之志積一生躬修實行不出乎孝謹善信以之述先範而貽後謨若公者豈非古所謂君子人歟不佞生晚恨不得執鞭於當日而今因是役附名於狀行之末則亦庶乎甘幸矣謹狀

  癸酉小春上澣  

    嘉善大夫弘文館副提學藝文館翰林原任  奎章閣直閣  完山李範錫謹狀

 

용재공의 행장

공의 휘는 시화(時和)요 자는 시숙(時叔)이며 호는 용재(庸齋)다. 진씨(晉氏)의 선계(先系)는 남원에서 나왔으니 남원군 휘 석(錫)의 후손으로 제주목사 휘 숭(嵩)의 11세손이요 훈련원 주부 휘 후창(后昌)의 10세손이다. 五세조의 휘는 영진(榮進)이요 고조의 휘는 범주(範疇)이며 증조의 휘는 용채(龍采)요 조의 휘는 대유(大有)며 고의 휘는 수봉(壽鳳)이니 호조참판이요 비는 정부인은 김해김씨다. 병인년 3월 5일에 공이 출생하였다. 공이 출생하면서 기이한 자질이 있었고 어릴 적부터 보통아이들과 달라서 성품이 학문을 좋아하였다. 집이 가난하여 비록 전의(專意)로 독서하지 못하나 어버이를 섬기고 나머지 힘이 있으면 반드시 스승을 좇아 계책을 물었다. 형제지간에 나와 너의 물건이 없었고 부모상을 만나 다 예와 같이하여 3년을 마치었고 매월 삭망(朔望)에 반드시 묘소에 가서 성곡(省哭)하였다. 자매를 대우함에 있어서 지극히 후하게 하여 항상 친히 가서 먹을 것을 주었고 종족을 돈목으로 대하였다. 자질을 가르치는데 더욱 힘을 써서 스승을 선택하여 학문을 가르치되 가계(家計)가 청빈하다는 것으로 해서 방과(放過)하는 바가 없었다. 만년에 더욱 스스로 신심(身心)을 수렴(收歛)하고 날로 방책(方冊)을 대하며 권중(卷中)에 있는 사람을 상우(尙友:숭상(崇尙)하는 벗)로 하였다. 이러함으로써 덕을 미루어 홀연(屹然)히 가문(家門)의 모범과 동량이 되었다. 불행히 병이 들어 수년을 신음하였는데도 오히려 서책 보는 것을 폐지하지 않았고 자질들이 혹 신정(神精)을 손상할까 근심하여 그리 마시라고 간하면 공이 말씀하기를 이것으로 병을 잊게 되니 무엇이 손상하겠는가 하였다. 기미년 4월 7일에 침실에서 돌아가시니 향년이 54이다. 통정대부 사복시 정으로 증직이 되었고 장지는 남원 동쪽 백파(白波) 오류동 축방을 등진 언덕이다. 배위 숙부인은 밀양박씨니 동광(同壙)하였다. 아들 4人이 있는데 성인(成仁)과 성의(成義)와 성례(成禮)와 성지(成智)이며 손자는 총 약간인(略干人)이다.

공이 총명하고 온아(溫雅)한 자질로 근고(勤苦)와 독려(篤勵)와 뜻을 더하여 일생을 쌓아 몸소 실행을 닦아 효근선신(孝謹善信)을 벗어나지 아니해서 이것으로써 선범(先範)을 계승하고 후모(後謨)를 이수(貽授)하기를 공과 같이하면 어찌 고소위(古所謂) 군자인(君子人)이 아니겠는가. 내가 출생하기를 늦게 하여 당일에 공을 모시지 못하고 지금 이것으로 인하여 행장지말(行狀之末)에 이름을 붙이게 되었은즉 역시 감행(甘幸)하기 짝이 없다. 삼가 장하노라.

  계유(1933)년 10월 상순에

    가선대부 홍문관 부제학 예문관 한림 원임 규장각 직각

    완산 이범석(李範錫)은 삼가 장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