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

 

監察忍齋公行狀 감찰 인재공 행장

 

公諱文鐘字聲遠自號忍齋晉氏其先南原人高麗戶部尙書文敬公諱含祚爲始祖殿中侍御史諱光仁南原君諱錫翰林學士諱于蘭皆其顯祖主簿諱以候叅奉諱再獻其十世若九世連世官蔭高祖諱後昌副司果曾祖諱宗宇祖諱邦潤考諱夏圭妣金海金氏父乃旭公以  純祖丙寅五月二十五日生于南原之蘆村弟生而敏悟幼不好弄孝友其天性十歲內外定省己如禮親癠抶持藥必先嘗丁憂毁逾於禮奉養偏慈極親滋味不計有無嘗糞血指及喪致毁木脫衰絰廬墓終制凡生養葬祭無違於禮而每晨謁家廟退而讀古人書日以爲常沉潛微奧講究性天終日無倦色家窶甚簞瓢常空而晏如也撫育二弟凡婚娶凡產物皆盡其心行義孚于人縣道交薦至蒙復戶之  典非公所屑也常以三尺蘿掛於璧上讀書之暇摩挲長唫曰養親方謂孝殉國是云忠欲養親不在何當效全忠丙子聞島夷犯京傳檄將擧義事平而止歎息作詩曰書劒吾家眞實物當年不惜滿籯金開篇可見聖賢志撫刃常存壯士心有意男兒終蹇蹇無情歲月亦駸駸蘿渝書蠹人俱老今乃相携巖穴尋蓋公素抱義勇無地可售寓意山水挈家入漁子洞行唫顔程朱川之間顧名思義慕聖賢之遺風舒嘯於臥龍柴桑之村因地寓情仰節士之高義石廩築晚樂之亭珠翠有九典之歌又不吝情去留遯入白雲山下紅芝洞所謂書劒人俱老相携巖穴尋者蓋寓意寫情也回念丙子年間事其念惋感慨當知何而今之視丙子猶可謂有家國焉有民社焉而所草檄文有一死報國之意使公見今日景色不西登于山必東蹈于海又未知壁上三尺攄用有地耶嗚呼欷矣享年七十五卒於  高宗庚辰二月十八日臨命顧謂其孫曰孝經是吾生平所嗜壁劒是吾危亂所售者也納經於棺瘞劒於墓言訖而終葬長水之理門洞南麓枕艮之原越七年丙戌  贈監察  命旌蓋以學行贈而孝行旌也  贈淑人慶州金氏德柱女先公圽别葬一男鳳一早卒娶全州崔氏育二子一女適全州崔錫詡孫長炳麟次炳龍公雅言不離於忠孝訓蒙人也以是勉後進也以是蓋自得於己者施及於人也其志行有忍齋自箴處世自警詩箴所謂百事能忍寬而自偈諸病必祛萬善自足詩所謂尊人卑己必無灾懲念安心應不惱者此爲徹上徹下行己大方推公躬行之餘可與人人爲元符也戒子詩大學韻可見公修齊之術而丙子檄公所抱志勇有一蘿靖難掃淸妖氛之氣而不幸則以一死當百萬嗚呼偉哉晚樂亭韻珠崒九典詩又見公쩨襟疎曠蕭散物表之意公大略可槩乎此餘可略也公之二抱收拾公事行委宇萬使狀其德將命者炳龍白首扶藜十舍裏足拙戒有不暇顧撮其來狀如上後有立言君子庶摭此而徵焉

  歲乙巳維夏    幸州奇宇萬撰

 

감찰 인재공의 행장

공의 휘는 문종(文鐘)이요 자는 성원(聲遠)이며 자호(自號)가 인재(忍齋)니 성은 진씨(晉氏)이다. 그 선조는 남원인이니 고려 호부상서 문경공 휘 함조(含祚)로 시조를 하였는데 전중시어사 휘 광인(光仁)과 남원군 휘 석(錫)과 한림학사 휘 우란(于蘭)은 다 그의 현달한 조상이다. 주부 휘 이후(以侯)와 참봉 휘 재헌(再獻)은 그의 10대와 9대조니 대를 연하여 관음(官蔭)이 있었다. 고조의 휘는 후창(後昌)이니 부사과요 증조의 휘는 종우(宗宇)며 조의 휘는 방륜(邦潤)이고 고(考)의 휘는 하규(夏圭)이며 비(妣)는 김해김씨니 아버님은 내욱(乃旭)이다. 공이 순조(純祖) 병인년 5월 25일에 남원의 노촌(蘆村)집에서 출생하였는데 나면서부터 영리하였고 어려서 희롱을 좋아하지 않았다. 효도와 우애는 그의 천성이어서 10세 내외에 혼정신성(昏定晨省:저녁에는 잠자리를 안정(安定)하게 해드리고 새벽에는 잘 주무셨는가 살피는 것)을 이미 예절과 같이 하였으며 어버이 병환이 계시면 부지(扶持)하여 약을 반드시 먼저 맛보았다. 일찍이 아버님 상을 만나 슬퍼하기를 예절에 지나치게 하였고 홀로 계신 어머님을 봉양하는데 맛있는 음식을 재산의 유무를 계산하지 않고 받들었으며 병환이 들어서는 똥을 맛보고 손가락 피를 내어 드렸고 상사(喪事)에 미쳐서는 슬픔을 지극히 해서 최질(衰絰:상복을 말한 것)을 벗지 아니하고 여묘(廬墓)로서 三년상을 마치었다. 무릇 생존해서 봉양하는 것과 돌아간 뒤의 장례와 제사를 예절에 어김이 없었고 매일 새벽에 가묘(家廟)에 배알한 뒤에 서재로 물러나와 고인의 글을 읽는 것을 상업(常業)으로 하여 현미(玄微)하고 오묘(奧妙)한 학문에 침잠(沈潛)하여 성리(性理)와 천명(天命)을 강구하되 종일 게으른 빛이 없었으며 가세는 심히 빈궁하여 단표(簞瓢)가 비어 있으나 편안하게 지내왔다. 두 아우를 어루만져 양육하여 무릇 혼인과 산물(產物)을 다 마음을 다하여 돌봐 주었다. 옳은 일을 행한 것이 사람에게 믿음이 되어 현도(縣道)에 서로 추천하여 복호지전(復戶之典:충신(忠臣) 효자(孝子) 절부(節婦)가 난 집에 호세(戶税)를 면제(免除)하는 것을 복호(復戶)라 함)을 입기에 이르렀으나 공이 탐탁하게 여기지 아니하였다. 항상 삼척검(三尺劍)을 벽에 걸어 놓고 독서하는 여가에 어루만지면서 길이 읊조리어 가로되 「부모를 봉양하는 것이 바야흐로 효도가 되는 것이지[養親方爲孝] 나라에 목숨 바치는 것은 충신이라 이르리로세[殉國是云忠] 봉양하고자 하나 어버이 계시지 아니하네[欲養親不在] 어찌해야 온전한 충성을 다하라[何當效全忠]」라고 하였다. 병자년에 오랑캐가 서울을 범하였다는 것을 듣고 격문(檄文)을 전하여 장차 의병을 일으키려고 하는데 일이 평정되어 그만두고 탄식하면서 시를 지어 가로대 「글과 칼은 우리집의 참된 보물이구나[書劍吾家眞寶物] 당년에 이것 구하느라 만영금(滿籯金)을 아끼지 아니하였네[當年不惜滿籯金] 책을 펴니 성현의 뜻을 가히 보겠구나[開篇可見聖賢志] 칼날을 어루만지니 항상 장사의 마음이 있도다[撫刃常存壯士心] 뜻 있는 남아는 마침내 충성을 다하고[有意男兒終蹇蹇] 정 없는 세월은 또한 달리기만 하네[無情歲月亦駸駸] 칼은 녹이 쓸고 글은 좀이 먹어 사람과 함께 늙으니[劒渝書蠹人具老] 지금 이에 서로 이끌고 암혈(巖穴)을 찾아가누나[今乃相携巖穴尋]」라고 하였으니 대개 공이 본래 의리와 용기를 품었으나 가히 수용(售用)할 땅이 없었다. 산수에 뜻을 붙이고 가족을 이끌어 어자동(漁子洞)으로 들어가 안정(顔程) 주천(朱川) 사이를 다니면서 이름을 돌아보고 의리를 생각하여 성현의 유풍(遣風)을 사모하였고 와룡(臥龍)과 시상(柴桑)의 마을을 거닐면서 거지(居地)를 인하여 정을 두고 절사의 고의(高義)를 우러러 보았으며 석름(石廩)의 만락정(晚樂亭)을 지으니 주취(球翠)의 아름다움을 찬미한 구곡가(九曲歌)가 있었다. 또 가고 머무는데 정이 인색하지 않아 다시 백운산(白雲山) 아래 홍지동(紅芝洞)으로 들어갔으니 이른바 「글과 칼이 사람과 함께 늙어 서로 이끌고 암혈을 찾아간다.」라는 귀절은 대개 뜻을 두고 정(情)을 쓴 것이다. 병자년 사이의 일을 돌이켜 생각하니 그 분완(忿惋)하고 감개(感慨)한 마음이 어떠하였던가. 지금 와서 병자년을 보건대 오히려 집과 나라도 있고 백성과 사직도 있다고 가히 말할 것인데 소초(所草)한 격문(檄文)에는 한 번 죽여 나라에 보답하려는 뜻이 있었으니 공으로 하여금 금일 경색(景色)을 보게 한다면 서쪽으로 수양산에 들어가지 않았다면―백이(伯夷)와 숙제(叔齊)의 일이다―반드시 동쪽으로 바다에 빠져 죽었을 것이니―노중련(魯仲連)의 일이다―벽상의 삼척검을 사용할 땅이 있었겠는가.

아! 슬프도다. 공이 향년 75세로 고종 경진년 2월 18일 운명(殞命)하기에 임하여 그 손자에게 말씀하기를 효경(孝經)은 이것이 내가 평생 즐겨 읽었던 것이고 벽검(壁劒)은 이것이 나의 위란(危亂)을 보수한 것이니 효경은 관 속에 넣어 주고 벽검은 묘 속에 묻어 달라 한 뒤에 말을 마치고 졸하였다. 장수(長水) 이문동(理門洞) 남쪽 기슭 간방(艮方)을 베개한 언덕에 장례를 모시었다. 7년 후 병술년에 감찰(監察)을 증직하고 정여(旌閭)를 명하시었으니 학행으로 증직을 하고 효행으로 정표를 한 것이다. 증숙인 경주김씨는 덕주(德柱)의 따님이니 공보다 먼저 돌아가 별도로 장례를 모시었다. 1남 봉일(鳳一)은 조졸(早卒)하였는데 전주최씨를 취하여 2자 1녀를 키웠으니 1녀는 전주 최석우(崔錫詡)에게 출가하였고 장(長)은 병인(炳麟)이고 차는 병룡(炳龍)이다. 공의 아언(雅言)은 충효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가인(家人)을 교훈하는데도 이것으로 하고 후진을 권하는데도 이것으로 하였으니 대개 스스로 몸에 얻은 것을 사람에게 베푼 것이다. 그의 지행(志行)은 인재자잠(忍齋自箴)과 처세자경시잠(處世自警詩箴)에 있으니 이른바 「백사를 능히 참아 너그럽게 스스로 묵묵(偈偈)하면 모든 병이 반드시 없어지고 만선(萬善)이 스스로 족하다」고 한 것과 시에 이른바 「사람을 높이고 자신을 낮추면 반드시 재앙이 없고[尊人卑己必無灾] 분함을 증계하고 마음을 편안이 하면 응당히 번뇌하지 않으리[懲忿安心應不惱]」라고 한 것은 이것이 철상(徹上) 철하(徹下)하는 행기대방(行己大方:몸 가지는 큰 방법)이니 공의 몸소 행하고 남은 것을 미른 것으로 가히 사람 사람과 더불어 원부(元符)로 할 것이다. 계자시(戒子詩)와 대학운(大學韻)에서 공의 수신제가하는 술법을 가히 볼 것이고 병자년 격문에서는 공의 품은 지용(志勇)이 하나의 칼로 난리를 평정하여 요괴로운 기운을 소청(掃淸)할 것이고 불행하면 한 번 죽음으로 백 만(百萬)을 당한다고 한 것이다.

아! 위대하도다. 만락정운(晚樂亭韻)과 주취구곡시(珠翠九曲詩)는 또 공의 소광(踈曠:대범하고 턱 트여 있는 것)한 흉금(쩨襟)과 물표(物表:세속(世俗) 밖을 말한 것)에 소산(蕭散:쓸쓸하고 한산한 것)한 뜻을 가히 보겠다. 공의 대략(大略)은 이렇게 대강 적고 나머지는 가히 생략할 것이다. 공의 두 분 손자가 공의 사행을 수습해 가지고 우만(宇萬)에게 위임하여 하여금 그 덕(德)을 장(狀)하게 하였다. 명을 가지고 온 자는 병룡(炳龍)이니 백수(白首)로 지팡이를 짚고 발이 부르터 십사(十舍:일사(一舍)가 삼십 리(三十里)로 십사(十舍)는 삼백 리(三百里)다)를 왔으니 졸계(拙戒:졸문(拙文)으로 인가(人家) 전세문자(傳世文字)를 짓지 말라는 경계)를 돌아다 볼 겨를이 없어서 그 가지고 온 장문(狀文)을 거두어 위(上)와 같이 찬술하노니 후일 입언군자(立言君子)가 계시거든 이것에서 가리어 증언하시기를 원합니다.

  세차(歲次) 을사(1905)년 여름에

    행주 기우만(奇宇萬)은 찬술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