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

 

義菴公行狀 의암공 행장

 

公諱敬智字維之號義庵姓晉氏南原君諱錫之后濟州牧使諱嵩十三世孫也五世祖諱範疇高祖諱龍采曾祖諱大有祖諱壽鳳號春湖官叅判考諱時和號庸齋妣密陽朴氏萬根女  正廟丙午正月十日生公于植恩亭里第天姿英敏才藝超凡年甫成童出就外傳勵志篤學見解甚高同隊聯槧者皆僕僕竪幡篤於孝友事二親必晨昏定省問寝視膳志焉色焉無或違咈與三兄共處幃幔天顯之樂常瀜如也嘗以親命屢赴公車而有命焉則遂歸賦遂初閉戸讀書以聖賢格言爲依歸模範平居必檢束身心未嘗有怠慢非辟之意想慕諸葛武侯陸秀夫忠義大節每誦出師表負海圖等篇悠然有曠世之感其胸中所存之義理可想見也公之於詩文著述皆有本有據藹然仁人之言而收拾無多只是殘篇斷簡然亦足以知全鼎之味矣何必以多爲貴也  贈通政大夫承政院右承旨兼經筵叅贊官辛酉三月十六日以疾皐于精舍距其享年七十六葬在府東葛峙內洞亥坐公娶配淑夫人密陽朴氏周昌之女後公歿墓在府西蛟龍山城艮坐有三男長丙元次道元又次溶元孫曾摠略干幷不錄嗚呼公生世德之家賦質愨之性考謹其本領也文學其箕弓也七十年潛修篤行卒之爲成德之君子令名久而不衰至今鄉黨之人誦之如當日豈不偉歟不佞固亦慕公之風者今於慈孫之請狀德也遂敢不辭而樂爲之叙次如上以俟秉筆家之栽釋云爾謹狀

  癸酉小春上澣      朝奉大夫童蒙敎官安東權丙洛謹狀

 

의암공의 행장

공의 휘는 경지(敬智)요 자는 유지(維之)며 호는 의암(義庵)이니 성은 진씨(晉氏)이다. 남원군 휘 석(錫)의 후손으로 제주목사 휘 숭(嵩)의 13세손이다. 5세조의 휘는 범주(範疇)요 고조의 휘는 용채(龍采)며 증조의 휘는 대유(大有)요 조는 휘는 수봉(壽鳳)이고 호는 춘호(春湖)며 관직은 참판이다. 아버님의 휘는 시화(時和)요 호는 용재(庸齋)이며 어머님은 밀양박씨니 만근(萬根)의 따님이다. 정묘(正廟) 병오(단기 4119)년 정월 10일에 식은정(植恩亭) 마을 집에서 공을 낳으니 천자(天姿)가 영민하고 재예(才藝)가 초범하여 겨우 15세에 외부(外傅:밖에 스승)에게 나가 뜻을 가다듬고 독실히 배워 견해(見海)과 심히 높아서 대열을 같이하고 책상을 연한 자가 다 항번(降幡)을 세웠다. 효우가 돈독하여 부모를 섬기는데 반드시 아침과 저녁에 잠자리를 정해 드리고 잘 주무셨는가 살피며 음식과 찬선(饌膳)을 살피어 뜻으로나 안색으로나 혹 어김이 없었고 삼형(三兄)과 더불어 한집에 같이 거처하면서 천현지락(天顯之樂)이 항상 융화(融和)하였다. 일찍이 어버이의 명령으로 여러 번 과거에 나갔으나 벼슬에 나가는 것은 운명이 있는 것인즉 드디어는 초심(初心)으로 돌아와 문을 닫고 글을 읽어 성현의 격언(格言)으로써 모범을 하여 의귀(依歸)하였다. 평소에 반드시 몸과 마음을 검속(檢束)하여 일찍이 태만하고 비벽(非辟:그르고 편벽된 것)한 뜻이 있지 아니하였으며 제갈무후(諸葛武候:한나라 제갈량(諸葛亮)의 시호가 무후(武候)이다)와 육수부(陸秀夫:송(宋)나라 말기(末期)의 충신(忠臣))의 충의 대절을 사모하여 출사표(出師表:제갈무후의 출사표)와 부해도(負海圖:송(宋)이 망(亡)하니 육수부가 바다에 빠져 죽었는데 이것을 그림으로 만들어 놓은 것)를 외우면서 유연(悠然)히 세상에 뛰어난 감상이 있었으니 그와 흉중(쩨中)에 존재한 의리를 가히 생각해 보겠도다. 공이 시문(詩文)을 저술한 것이 다 근본이 있고 의거한 것이 있어서 인인(仁人)의 말씀이 애연(藹然)하였는데 수습한 것이 많지 못하고 다만 이같은 단편 단간(短篇斷簡)일 뿐이나 또한 족히 전정(全鼎)의 맛을 알 것이니―한 숟갈의 국맛을 보면 그 전체 가마솥 속에 있는 국맛을 안다는 말―어찌 많은 것을 귀하게 여기겠는가. 통정대부 승정원 우승지 겸 경연 참찬관을 증직하였다. 신유년 3월 16일에 병으로 정사(精舍)에서 돌아가니 향년이 76이고 장지는 부동(府東) 갈치(葛峙) 내동(內洞)의 해좌이다. 공의 배위 숙부인 밀양박씨는 주창(周昌)의 따님이니 공보다 뒤에 돌아가 묘는 부서(府西) 교룡산성(蛟龍山城) 간좌에 있다. 3남을 두었으니 장남은 병원(丙元)이요 차남은 도원(道元)이며 3남은 용원(溶元)이니 손증(孫曾)이 총 약간이 있는데 아울러 다 기록하지 아니한다.

아! 공이 세덕지가(世德之家:대대로 덕이 있는 집)에 출생하여 질각(質慤)한 성품을 타고나 효근(孝謹)은 그 근본이고 문학은 그의 가업(家業)이다. 70년을 잠수독행(潛修篤行)하여 마침내 성덕군자(成德君子)가 되어 영명(令名)이 오래도록 쇠하지 아니하여 지금까지 향당(鄉黨)사람이 칭송하기를 당일같이 하고 있으니 어찌 훌륭하지 아니한가. 나 역시 공의 풍도를 사모하는 자이므로 지금 그의 사랑하는 손자가 장덕자문(狀德之文)을 청하는데 드디어 감히 사양하지 아니하고 즐거이 위(上)와 같이 서차(叙次:차례로 서술(叙述)하는 것)하여 병필가(秉筆家:붓을 잡고 역사를 쓰는 사람)의 선택하기를 기다린다. 삼가 장(狀)하노라.

  계유(1933)년 10월 상순에

    조봉대부 동몽교관 안동 권병락(權丙洛)은 삼가 장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