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

 

高節堂公行狀 고절당공 행장

 

人家祖先設有曲謹小節爲其後仍者當闡揚之不暇而况有潛德雅望世皆慕仰可爲一世聞人而其孝子慈孫之心誠繼述庸有旣乎此晉公高節堂實行之所由狀也公諱道旭字元中有堅確不拔之志節故人稱高節堂謹按南原之晉自高麗戶部尙書謚文敬諱含祚後名碩簪纓世襲聯綿蔚然爲南鄉望族至諱壽卿以孝行賑睦聞于  朝特除一命察訪纔試牛刀隱居不仕寔公六代祖也高祖諱邦濂號桂圃曾祖諱載圭號正巖祖諱光明號菊齋考諱璣成號三樂堂世蒙官職有世稿一밧爲庚燹所遺失妣密陽朴氏以  正廟丁巳四月九日生公于玉川仁溪鄉湥草里第自幼孝行根天二養愼追遵禮無憾敦睦姻親惠及黨隣人皆嘖嘖稱道焉以  高宗甲戌四月六日考終壽階嘉善配貞夫人金海金氏壼儀無闕後公一年戊午生先公二十七年丁未圽墓同郡東溪面同心里雙墳生三子諱炳啓號竹圃克守先業諱炳聖號松波文藝名世諱炳仲號晚惺克盡孝悌俱載蔭仕編滿夏肯夏炳啓二子一夏宗夏炳聖二子成夏辰夏炳仲二子以下曾玄不盡錄公之玄孫聖鐸起鐸淳鐸言貌雅婉可想法家子孫懼夫先蹟之久遠泯沒來示家乘徵余狀文顧余辭拙望微不堪當操觚之任而於信友晉誠庵處多聞公家聲譽故略書如上然年代頗遠蹟公行治多有率略是所遺憾人家有起家之祖必有克家之孫繼承之可謂故家規範今觀高節堂門戶則可謂有是祖有是孫然則晉氏一宗非專爲帶方世閥亦可稱玉川華族也歟姑書此以竣後之君子

  歲在乙未臨月下浣  月城全炯植謹狀

 

고절당공의 행장

사람의 집의 선조가 비록 곡근소절(曲謹小節:곡진하게 삼가는 적은 절의(節義))이 있으나 그 후손이 되는 자는 마땅히 천양(闡揚)하는데 겨를이 없을 것인데 하물며 깊은 덕과 아름다운 명망이 있어 세상 사람이 다 우러러보고 사모하여 가히 한 세상의 문인(聞人)이 된다면 그 효자자손(孝子慈孫)의 마음으로 진실로 계술하기를 어찌 끝이 있겠는가. 이러하므로 진공 고절당(高節堂)의 실행을 장문(狀文)으로 만드는 바이다. 공의 휘는 도욱(道旭)이요 자는 원중(元中)이니 견확(堅確)하여 뺏지 못할 뜻이 있는 고로 사람들이 고절당이라고 칭도하였다. 삼가 안험하건대 남원의 진씨(晉氏)가 고려 호부상서 시호 문경공 휘 함조(含祚)로부터 뒤로 오면서 명인석사(名人碩士)의 잠영(簪纓)이 대대로 이어 내려와 울연(蔚然)히 남향(南鄉)의 망족(望族:인망이 있는 종족)이 되었다. 휘 수경(壽卿)에 이르러서는 효행과 진목(賑睦)이 조정에 들리어 특별히 일명 찰방(一命察訪)을 제수하여 겨우 우도(牛刀:닭을 잡는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쓰느냐라는 공자의 말씀이 있음)를 시험하고 숨어 살면서 벼슬을 아니하였으니 이 분이 공의 6대조이다. 고조의 휘는 방렴(邦濂)이요 호는 계포(桂圃)이며 증조의 휘는 재규(載圭)이요 호는 정암(正庵)이다. 조의 휘는 광명(光明)이고 호는 국재(菊齋)이며 아버님의 휘는 기성(璣成)이고 호는 삼락당(三樂堂)이니 대대로 관직이 있었고 세고(世稿) 한 질이 있었는데 경희(庚燹)의 유실하였다. 어머님 밀양박씨가 정묘(正廟) 정사년 4월 9일에 옥천(玉川) 인계향(仁溪鄉) 심초리(深草里) 집에서 공을 낳았는데 어릴 적부터 효행이 근천(根天)하여 부모를 봉양하고 초종 상사를 삼가하며 원조(遠祖)를 추모하는데 예를 좇아 부족함이 없었다. 인친(姻親)에게 돈목하고 당인(黨隣)에게 은혜가 미치니 이웃사람들이 다 책책(嘖嘖) 칭도하였다. 고종(高宗) 갑술년 4월 6일에 고종(考終:천수(天壽)를 누리고 죽는 것을 말함)하니 수직(壽職)으로 가선(嘉善)의 품계(品階)를 주었다. 정부인 김해김씨는 규문(閨門)의 예의를 궐실(闕失)함이 없었고 공보다 일 년 뒤에 무오년에 출생하였고 공보다 27년을 먼저 해서 정미년에 돌아갔으며 묘는 같은 군 동계면(東溪面) 동심리(同心里)에 쌍분으로 되어 있다. 3자를 낳았는데 휘 병계(炳啓)는 호가 죽포(竹圃)니 능히 선업을 지키었고 휘 병성(炳聖)은 호가 송파(松波)니 문예(文藝)로 세상에 울리었고 휘 병중(炳仲)은 호가 만성(晚惺)이니 능히 효제를 다하여 다함께 음사편(蔭仕篇)에 실렸다. 만하(滿夏)와 긍하(肯夏)는 병계의 두 아들이요 일하(一夏)와 종하(宗夏)는 병성의 두 아들이며 성하(成夏)와 진하(辰夏)는 병중의 두 아들이다. 이하 증손과 현손은 다 기록하지 못한다. 공의 현손 성탁(聖鐸), 기탁(起鐸), 순탁(淳鐸)이 말씀과 모양이 단아(端雅)하고 완만(婉娩)하니 그 법가(法家) 자손임을 가히 상상하겠다. 선조의 행적이 오래되면 민몰할까 두려워하여 와서 가승(家乘)을 보이면서 나에 장문(狀文)을 부탁하였다. 돌이켜 보건대 내가 문사(文辭)는 졸렬하고 인망(人望)은 천미하여 글짓는 책임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믿는 친구 진성암(晉誠庵)에게서 공의 집 성예(聲譽)를 많이 들은 고로 간략히 위(上)와 같이 쓰는 바이다. 그런데 연대가 자못 멀어서 공의 행치(行治)를 추적하는데 솔약(率略)함이 많이 있으니 이것이 유감되는 것이다. 사람의 집에 집을 일으키는 할아버지가 있으면 반드시 집을 잘 다스리는 손자가 있어서 계승하여 고가규범(古家規範)이라고 가히 이를 것이다. 지금 고절당의 문호(門戶)를 본다면 가히 이러한 할아버지가 있고 이러한 손자가 있다고 말하겠다. 그러하다면 진씨의 일종(一宗)이 오로지 대방(帶方:남원(南原)의 구호(舊號))의 세벌(世閥)만 될 뿐아니라 옥천(玉川)의 화족(華族)이라고 가히 칭도하리로다. 아직 이같이 써서 후일의 군자를 기다리노라.

  세차 을미(1955)년 10월 하순에

    월성 김형식(金炯植)은 삼가 장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