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

 

進士晩翠公行狀 진사 만취공 행장

 

晉公希伯舘佘家二十餘年年同庚道相合有鍼芥之雅余三子幷受業自識之無至成立勤於敎誨今幷取科宦粗解應世者皆公賜也余以未有以報積歉于心乃公始終無一言一事以私干者常恬如也佘尤感而敬之然此特其小節也佘詳公平生有可曰大節者二焉公嘗應鄉試叅解額朝廷罷其榜㪅設或勸再赴公曰前榜之名復列後榜損試體壞士習不可也竟不赴此其一也公之操履蘊抱施于有政可以無適不當而旅遊京師久不遇雖其守正不營求有素執而硏究學藝夙講義理非無意於當世者甲午變革公歎曰時事可知也決意別佘歸挈家入智異山不通問聞以終其世此其二也若公者豈非至行高節古君子歟公諱昌旭希伯字也晉氏籍南原以麗朝尙書文敬公諱含祚爲鼻祖其後有諱光仁殿中侍御史生諱錫討契丹有功載麗史入本  朝有諱自康軍資監判官生諱京童啓功郞生諱碩佐從仕郞生諱繼楊承仕郞生諱起福  宣陵叅奉生諱亨升進士歷三世至諱邦直諱伯圭諱翼明諱璣文卽公高曾祖禰也妣慶州李氏士人桐臣女公以己亥五月二十五日生于南原池塘自幼有異質端重不妄言笑如成人篤于孝友年十一丁內憂慽哀之中一遵禮制鄉里稱之事繼母如所生撫愛羣弟衣食貲財無所私及冠才藝絶倫與師友討論經義隨處領解不待啓發而自得於言議之外承親敎兼治功令學幷工六軆爲湖南巨匠辛巳丁外憂毁瘠幾滅性乙酉中進士以不得供悅於親在時爲終身痛己亥五月八日卒于山東寓室距週甲只十八日也葬于本郡大谷犢山癸坐原配順興安氏父廷祉有淑德先公十二年卒墓同崗壬坐育一男三女男炳宇女適趙性昊蘇秉壎李會玲炳宇五男皆幼嗚呼佘與公誼托主賓情同骨月旣備論之矣自公入山暌離鄙吝亦屢年耿然之懷無時暫忘及凶音至佘時在鳳山官衙涕下幾失聲顧身縻職務不能作絮奠相紼路負公於幽明之際也聞公比年養閑頤情讀書窮理一切不以事物嬰其懷語人曰戾洛還鄉道路歲月己迫桑榆此誠邵堯夫所謂道在是矣者也若天假幾年可以究前日未盡之理酬宿昔未得之願余尤繹其語而歎惜之夫公之所願者卽讀書窮理非世俗之所同願也道義澤身豈榮辱得喪區區外物之可移其志哉文藁若干卷之藏于家皆文學而附經義者寔公典型之所寓也炳宇君狀公行將刊于譜牒跋涉千里踵余門泣而請曰先君一生惟公知之敬以文請佘雖不文義不可辭且余亦老矣幾何不相從而嘗以未有以報爲恨者陋拙文字是其所以報歟可悲也謹按其家錄與余所懷撰次以歸之俾刊焉

  歲乙巳四月下澣  

    嘉善大夫前行吏曹叅判兼同知經筵義禁府春秋館成均館事東萊鄭寅學狀

 

진사 만취공의 행장

진공(晉公) 희백(希伯)이 나의 집에 와서 머무른 지가 20여 년이 되었다. 연령은 동경(同庚)이고 도의는 상합해서 침개지아(鍼芥之雅:침과 개자 같은 종흔정리란 것이니 자석(磁石)은 능히 침(鍼)을 이끌고 호박(琥珀)은 능히 개(芥)를 줍는 고로 성정(性情)이 서로 합(合)하는 것을 비유한 말)가 있었고 나의 세 자식이 아울러 공에게 수업해서 아는 것이 없을 때부터 성립(成立)하기에 이르기까지 부지런히 교회(敎誨)하여 지금은 아울러 과환(科宦: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을 하는 것)을 취하여 세도(世道)에 수응할 줄을 알게 된 것은 다 공이 준 것이다. 내가 보답한 것이 있지 못함으로 해서 마음에 유감이 있었으나 공이 일언일사(一言一事)라도 사적으로 간구(干求)하는 것이 없어서 항상 마음에 아무런 생각도 없이 편안하게 지내왔으니 내가 더욱 감사하게 여기어 공경한다. 그러나 이것은 특히 그의 소절(小節)이다. 내가 공의 평생을 자상히 알고 있어 가히 대절(大節)이라고 말할 것이 두 가지가 있다. 일찍이 향시(鄉試)에 나가 해액(解額:합격(合格))에 참여하였었다. 조정에서 그 방(榜)을 파(罷)하였다가 다시 설치하였는데 혹자가 재차 향시에 나가라고 권하니 공이 말씀하기를 「전방(前榜)의 이름이 다시 후방(後榜)에 열치(列置)되면 시체(試軆)가 손락(損落)되고 사습(士習)이 괴란(壞亂)되는 것이니 이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 하고 마침내 나가지 아니하였으니 이것이 그 대절의 하나요, 공의 조행(操行)과 포부를 정치에 시행하였다면 가는 곳마다 마땅하지 아니함이 없을 것인데 경사(京師)에 나그네로 놀아 오래도록 때를 만나지 못하였다. 비록 그가 정도를 지키고 영구(營求:계략(計略)으로 구(求)하는 것)하지 않는 소집(素執)이 있었으나 학문과 문예(文藝)를 연구하고 의리를 강론하니 당세에 뜻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갑오년 변혁에 공이 탄식하여 가로대 시사(時事)를 가히 알 것이다 하고 뜻을 결정하여 나를 작별하고 돌아가서 가족을 이끌고 지리산으로 들어가 문문(問聞:묻고 듣는 것)을 통하지 아니하고 그 세상을 마치었으니 이것이 그의 대절에 두 가지다. 공같은 분은 어찌 지행(至行)과 고절(高節)을 갖춘 옛 군자가 아니겠는가. 창욱(昌旭)은 희백의 자(字)이다. 진씨가 남원에 적(籍)을 두고 고려조 상서 문경공 휘 함조(含祚)로 시조를 하였고 그 뒤에 휘 광인(光仁)이 있는데 전중시어사요 이 분이 낳은 휘 석(錫)은 거란을 토벌하여 공훈이 있어 고려사에 실려 있다. 본조(本朝)에 들어와서 휘 자강(自康)이 있는데 군자감 판관이요 이 분이 낳은 휘 경동(京童)은 계공랑이며 이 분이 낳은 휘 석좌(碩佐)는 종사랑이고 이 분이 낳은 휘 계양(繼楊)은 승사랑이며 이 분이 낳은 휘 기복(起福)은 선릉참봉이고 이 분이 낳은 휘 형승(亨升)은 진사이다. 3대를 지나 휘 방직과 휘 백규(伯圭)와 휘 익명(翼明)과 휘 기문(璣文)은 공의 고조와 증조와 조부와 아버님이시다. 어머님 경주이씨는 사인(士人) 동신(桐臣)의 따님이다. 공이 기해년 5월 25일에 남원 지당에서 출생하였으니 어릴 적부터 특이한 기질이 있었고 단정하고 무거워 말과 웃음을 망령되게 아나하여 성인(成人)과 같았으며 효도와 우애가 독실하였다. 연령 11세에 내간상을 당하여 척애지중(慽哀之中)에 일체 예제(禮制)를 준행 하니 향리(鄉里)에서 칭찬이 자자했다. 계모 섬기기를 소생 어머님 같이 하였고 여러 아우를 어루만져 사랑하여 의식(衣食)과 자재(資財)를 사사로이 더 갖는 바가 없었다. 20세에 이르러 재예(才藝)가 절륜(絶倫)하여 사우(師友)와 더불어 경서(經書)의 의리를 토론하는데 지적하는 곳마다 이해하여 계발(啓發)해 주기를 기다리지 않고 언의(言議) 밖에서 스스로 얻어 알았다. 아버님의 가르침을 이어 받들어 공령학(功令學:과거 보는 학문)을 겸하여 다스리어 육체(六軆:과거에서 시험 보는 시부(詩賦), 표(表), 책(策), 논(論), 의(疑)이다)를 아울러 공부하여 호남의 거장(巨匠)이 되었다. 신사년에 외간상을 만나 애훼수척(哀毁瘦瘠)하여 거의 멸성(滅性:죽음을 뜻한 것)할 뻔하였다. 을유년에 진사에 합격하였으나 어버이 생존 시에 기쁨을 받들어 드리지 못한 것으로 종신통(終身痛)을 하였다. 기해년 5월 8일에 산동 우실(寓室)에서 졸(卒)하니 주갑에 거리가 다만 18일이다. 본군(本郡) 대곡 독산 계좌원(癸坐原)에 장례 모시었다. 배위 순흥 안씨(安氏)는 아버님이 정지(廷祉)이다. 숙덕(淑德)이 있었고 공보다 12년 먼저 돌아갔고 묘는 같은 언덕의 임좌(壬坐)이다. 1남 3녀를 생육하였으니 남은 병우(炳宇)요 여는 조성호(趙性昊)와 소병훈(蘇秉勳)과 이회령(李會玲)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병우가 5남인데 다 어리다.

아! 내가 공과 더불어 주빈(主賓)의 의(誼)로 골육(骨肉)의 정을 가진 것은 이미 다 비논(備論)하였다. 공이 산에 들어간 뒤로부터 헤어져서 나의 가슴에 비린지심(鄙吝之心)이 생긴 지가 또한 여러 해가 되어 경연지회(耿筵之懷)를 잠시도 잊을 때가 없었다. 흉음(凶音:부고(訃告))이 이를 때는 내가 그때 봉산(鳳山) 관아(官衙)에 있었는데 눈물이 흘러 거의 실성통곡하였다. 돌이켜 보건대 몸이 직무(職務)에 얽매이어 전(奠)을 드리고 상여줄을 잡지 못하니 유명지제(幽明之際)에서 공을 져버리었도다. 들으니 공이 근년에 한가히 수양하고 정을 평화롭게 가져 독서 궁리할 뿐 일체(一切) 사물(事物)을 그 회포(懷抱)에 두지 아니하고 사람에게 말하기를 「서울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그동안 도로(道路)에서 세월을 보내어 이미 나이가 상유(桑榆:해가 지는 곳임)에 가까웠으니 이것은 소요부(邵堯夫:송(宋)나라 대유(大儒)인 소강절(邵康節)의 자(字)임)가 이른바 도가 이것에 있다는 것이다. 만약 하늘이 몇 해만 더 빌려 준다면 가히 전일의 다하지 못했던 의리를 연구하고 옛날의 얻지 못했던 원을 이루리라.」고 하시었다니 내가 더욱 그 말씀을 해석하면서 탄석(嘆惜)하는 바이다. 무릇 공이 원하는 바는 즉 독서 궁리하는 것이요 세속(世俗)에서 원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 아니나 도의(道義)가 몸에 윤택하면 어찌 영욕득상(榮辱得喪)의 구구한 외물로 그 뜻을 가히 옮기겠는가. 문고 약간(若干)의 책을 집에 저장하였으니 다 문학(文學)에 경의(經義)를 부친 것으로 공의 전형(典型)이 있는 것이다. 병우군이 공의 행적을 장(狀)으로 하여 장차 보첩에 간행(刊行)하려고 천리를 발섭(跋涉)해서 나에게 와가지고 울면서 청하기를 선군(先君:돌아가신 아버님이란 말)의 일평생은 오직 공이 알고 계심으로 공경히 글을 청합니다 하거늘 내가 비록 글을 못하나 의리에 가히 사양하지 못하겠고 또 나 역시 늙었으니 얼마 되지 않아 지하에서 상종(相從)할 것인데 보답함이 있지 못한 것으로 한이 되게 하겠는가. 이 누졸(陋拙)한 문자가 이것이 보답이라는 것이겠는가. 슬프도다. 그 가록(家錄)을 삼가 상고하고 내가 생각하는 것과 더불어 찬술하여 돌려보내어 간행하게 한다.

  세차 을사(1905)년 4월 하순에

    가선대부 전행 이조참판 겸 동지경연 의금부 춘추관 성균관사

    동래 정인학(鄭寅學)은 장(狀)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