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

 

南溪公行狀 남계공 행장

 

日晉君炳純以其先大人南溪先生行錄屬之曰顧今世級日下好尙日遷蓄道藏德操觚立論議之家不無其人而知吾父生平者莫于若也顧此人微辭拙不敢承當然追慕成童嘗受學于門下者有年矣文字之役義不敢辭謹按先生姓晉諱儹旭字道明而南溪號系出高麗尙書左僕射謚文敬諱含祚而至季世有諱錫討契丹有功封南原君  麗末  有諱如蘭宣德郞  珍原監務有諱自康軍資判官有諱繼楊承仕郞有諱起福宣陵叅奉有諱亨升成均生員曾祖諱伯圭祖諱翼明考諱璣文隱居求志啓牖後進妣慶州李氏延安李氏兄弟五人長昌旭進士前妣出仲台旭定旭京旭而先生其季也以  高宗丙寅六月二十六日生于南原月溪村而壽七十二以丁丑十月十九日卒于任實柯田而墓任實屯德峙未坐原配全州李氏鴻儀女天偈齋尙馨后也克相無違一男卽炳純二女適金奇述金敦洙啓夏商夏泰夏皆其孫也先生以季生不得長事父母爲恨居喪易戚備盡非有甚不得己之故未嘗一日暫離喪次迨夫僑于柯田也雖祈寒盛暑躋阻涉險徒步百里未嘗闕親忌事進士公如嚴父一事一行無敢自專而與仲兄台旭公友愛尤篤及其歿後每於夜枕淚痕常霑家貧敎授諸生而嚴立程課未嘗一日放慢終日端座齊整顔色以嚴師弟子之禮飮戶素寬以至無量而未嘗一言之惑亂也良辰美景觴酒文讌之席貌益恭而口益訥風流閒雅辭氣平易不以礉礉絶俗而自高亦不靡靡隨物而苟同謹愿有長厚風故終席而退相與歎其質行之不可及而文華之不足多也嗚呼此身何以復得親侍左右承諄之誨也重爲之太息而謹狀

  柔兆涒灘暮春上澣   南陽洪淳柱謹撰

 

남계공의 행장

어느 날 진군 병순(炳純)이 그 선대인 남계 선생의 행록(行錄)을 가지고 와서 부탁하면서 말하기를 돌이켜 보건대 지금 세급(世級)이 날로 내려가고 호상(好尙:좋아해서 숭상하는 것) 날로 옮겨지고 있다. 도를 기르고 덕을 감추며 글을 지어 입논(立論)을 하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나 우리 아버님의 평생을 아는 사람은 자네와 같은 사람이 없다고 하였다. 돌이켜 보건대 내가 사람은 미천하고 문사는 졸렬하여 감히 승당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15세로부터 문하에 수학한 지가 여러 해 되었던 것을 추모하니 문자지역(文字之役)을 의리에 감히 사양하지 못하겠다. 삼가 살펴보건대 선생의 성은 진(晉)이요 휘는 찬욱(儹旭)이며 자는 도명(道明)인데 남계(南溪)는 호이시다. 세계(世系)는 고려 상서좌복야 시호 문경 휘 함조(含祚)에서 나왔다. 고려 계세(季世)에 이르러 휘 석(錫)이라는 분이 있어 거란(契丹)을 토벌하고 공훈이 있어 남원군을 봉하였다. 고려조 말엽에 휘 여란(如蘭)이라는 분이 있는데 선덕랑으로 진원감무를 하였고 휘 자강(自康)은 군자판관이며 휘 계양(繼楊)은 승사랑이요 기복(起福)은 선릉참봉이며 휘 형승(亨升)은 성균 생원이다. 증조의 휘는 백규(伯圭)요 조의 휘는 익명(翼明)이며 고(考)의 휘는 기문(璣文)이니 숨어 살면서 뜻을 구하여 후진을 계유(啓牖)하였으며 비(妣)는 경주이씨와 연안이씨이다. 형제분이 다섯인데 장형 창욱(昌旭)은 진사니 전비(前妣)가 낳았고 다음은 태욱(台旭), 정욱(定旭), 경욱(京旭)인데 선생은 그 끝이시다. 고종(高宗) 병인년 6월 26일에 남원 월계촌(月溪村)에서 출생하시었는데 수 72로 정축년 10월 19일에 임실(任實) 가전리에서 돌아가시었으며 묘소는 임실 둔덕치(屯德峙) 미좌원(未坐原)에 모시었고 배위는 전주 이홍의(李鴻儀)의 따님이며 천묵재 상형(天偈齋尙馨)의 후손이니 능히 서로 어김이 없었다. 1남은 즉 병순(炳純)이요 2녀는 김기술(金奇述)과 김돈수(金敦洙)에게로 출가하였다. 계하(啓夏)와 상하(商夏)와 태하(泰夏)는 다 그의 손자이다. 선생이 끝에 태어나서 부모를 오랫동안 섬기지 못한 것으로 한(恨)을 해서 상중에 계실 때 애척(哀戚)을 다하시어 심히 부득이한 일이 아니면 일찍이 하루라도 상차(喪次)를 떠나지 아니하시었다. 가전(柯田)에 거주하실 적에도 비록 혹독한 추위와 성한 더위라도 고개를 넘고 물을 건너 백 리를 걸어가 친기(親忌)를 궐하지 아니하였다. 진사공 섬기기를 엄한 아버님 같이하여 일사일생(一事一行)을 감히 스스로 전행(專行)하지 않았으며 중형 태욱 공과 우애가 더욱 두터웠는데 그가 돌아간 뒤에 매양 밤이 되면 베개에 눈물 흔적이 항상 젖어 있었다. 집이 가난하여 제생(諸生)을 교수하시는데 과정(課程)을 엄하게 세워 일찍이 하루라도 방만(放慢)하지 아니하시고 종일 단정히 앉아 안색(顔色)을 바르게 하여 스승과 제자와 예를 엄숙하게 하시었다. 마시는 양이 본래 크시어 무량(無量)에 이르나 일찍이 한 마디의 말씀도 취하여 어지러운 것이 없으시었으며 양진미경(良辰美景)에 술잔을 기울이며 글을 짓는 자리에서는 모양이 더욱 공손하고 입이 더욱 무거웠다. 풍류(風流)가 한아(閒雅:한가하고 우아한 것)하고 사기(辭氣)가 평이(平易:평화한 것)하여 핵핵(礉礉:혹독한 모양)으로 써 세속과 끊고 스스로 높은 체하지 아니하셨으며 또한 미미(靡靡:휩쓸려서 따르는 모양)하게 사람들 따라 구차하게 합동하지 아니하였고 근검하고 성실하여 장후(長厚)한 풍도 있는 고로 자리를 마치고 물러 나와서는 서로 더불어 그의 질박한 행실을 가히 미치지 못할 것을 탄식하나 문화(文華)의 부족함은 많으시었다.

아! 이 몸이 어찌해야 다시 좌우에 친히 모시고 순순(諄諄)한 교회를 받들겠는가. 거듭 크게 탄식하는 바이다. 삼가 장하노라.

  병신(1956)년 3월 상순에

    남양 홍순주(洪淳柱)는 삼가 찬술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