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

 

處士竹下公行狀 처사 죽하공 행장

 

公諱炳瓛字平恩初號偈菴以其言寡行敏儕輩稱之且以公有晉徵士陶靖節之淸趣隱居竹林之下故泛稱竹下處士云故因以爲號焉謹按南原之晉以高麗戶部尙書文敬公諱含祚爲鼻祖繼有殿中侍御史諱光仁是生諱錫號睡隱隱德不仕而智略出人被  高宗諭名討契丹大捷有偉績封南原君厥後燮葉簪組聯綿焉至諱壽卿官察訪有茂績雅望備載崔啓翁撰墓碣文於公爲七世祖也高祖諱元圭號取醉亭曾祖諱得明號晚悔齋行德俱載狀文祖諱璣七考諱昇旭治家有法勤儉力穡爲起家祖年踰八耋蔭通政妣善山金氏圭珩女有四男公居二房公生于  高宗癸亥二月二十四日自幼學業勤孜孝友根天事親二養備至故通政公及淑夫人年過八旬終于次子家及丁內外艱哀毁遵禮於兄弟三家產業分均一門雍睦殫誠爲先墓儀一新每念親墓有虞常延地師求吉地而有一良地師云者有幣以一牛則給一明堂之説時方春耕期公卽使人名回耕牛併馱穀物而送其人驚歎湥謝曰世豈有如晉公者乎爲親之誠意如此安有不得吉地者乎居常治生與物無競無一毫利己害人之事自餘御家接人之節皆可例也鄉黨咸稱晉竹下眞君子人也自肄業村塾時及從士友力學孜忔惺齋房容圭荷凡尹永哲曙窓房澤圭西坡金敬植諸氏多南中巨擘皆同槧儕友相與麗澤工於程文亦不屑於試塲常曰士之爲學豈在於仕宦一路而己耶隱居求志俯仰無愧亦一事也以小學一書爲究竟心書簡重寡偈不染聲色樂在林泉優遊自適宅近有蓼湖龍山之勝每登臨觴詠翛然忘歸及在病床呼子孫托以勉勵學業孝友相傳勤儉力穡不廢先業爲遺囑數言浩然而長逝時己未八月十日也嗚呼仁而不壽賢而未達以公之叔世完人壽未滿六十而止天理之難諶果如是乎墓求禮郡山洞面大村後負乾原配南陽房氏煥忠女壼儀無闕隣里咸稱賢婦人公之遊學內助居多後公三歲圽有一男三女男巨夏女適安慶鎬黃德顯金福述巨夏娶文化柳氏時永女有三男奎復奎哲奎璋奎復男元澤餘內外孫曾或幼或遠在不盡錄炯植居在一里陪遊年久多蒙敎誨恒切羹墻一日巨夏君來示先蹟一밧曰吾宗方葺世稿鄙先考潛蹟幽光不可泯焉子盍爲我狀焉佘瞿然曰先公狀德文字不啻縝重當徵於秉筆者而何及於此文望俱拙者乎不須請不堪當兩地胥失云而世設有其人於先人行治始終詳實無如炯植君則勿撝謙而固辭囑之不己故遂略叙如上以俟後之君子裁擇焉

  歲乙未復月下浣    月城金炳植謹狀

 

죽하공의 행장

공의 휘는 병헌(炳瓛)이요 자는 평은(乎恩)이며 처음의 호는 묵암(偈庵)이니 말씀은 적고 행동은 민첩한 것으로써 친구들이 칭도하였던 것이다. 또 공이 도정절(陶靖節)의 청고한 취미가 있어 죽림지하(竹林之下)에 숨어 살았던 고로 범칭(泛稱) 죽하처사(竹下處士)라고 하였기 때문에 인하여 호로 하였다. 삼가 살피건대 남원 진씨(晉氏)씨가 고려 호부상서 문경공 휘 함조(含祚)로 비조(鼻祖)를 하였다. 이어서 전중시어사 휘 광인(光仁)이 있었고 이 분이 낳은 휘 석(錫)은 호가 수은(睡隱)이니 덕을 숨기고 벼슬을 아니하였는데 지략(智略)이 보통사람보다 뛰어나고 고종(高宗)의 유소(諭召)를 받고 거란(契丹)을 토벌하여 크게 승리하였으므로 위적(偉績)이 있어 남원군을 봉하였다. 그 뒤로 혁엽(赫葉) 잠조(簪組)가 연속되었고 휘 수경(壽卿)에 이르러서는 관직이 찰방으로 무적(茂績) 아망(雅望)이 있어서 최계옹(崔啓翁)이 찬술한 묘갈문에 실려 있으니 공에게 7세조가 되신다. 고조의 휘는 원규(元圭)요 호는 취취정(取醉亭)이며 증조의 휘는 득명(得明)이고 호는 만회재(晚悔齋)니 행덕은 다함께 장문(狀文)에 실려 있다. 조의 휘는 기칠(璣七)이요 고의 휘는 승욱(昇旭)이니 가정을 다스림에 있어서 법도가 있어 부지런하고 검소하며 힘써 농사를 지어 기가조(起家祖)가 되었고 연세가 80이 넘어 수직(壽職)으로 통정(通政)이 되었으며 어머님은 선산김씨니 규행(圭珩)의 따님이다. 4남이 있었는데 공의 서열은 2방이다. 공이 고종 계해년 2월 24일에 출생하였는데 어릴 적부터 학업을 부지런히 하였으며 효우(孝友)가 근천(根天)하여 어버이를 섬기는데 이양(二養:뜻과 몸 둘을 다 봉양하는 것)이 지극하였던 고로 통정공과 숙부인이 연세가 80이 넘었고 둘째 아드님 집에서 세상을 마쳤다. 내간상과 외간상을 만나서는 애훼(哀毁)하여 예를 좇았고 형제간에 있어서는 삼가산업(三家產業)을 골고루 나눠 일문(一門)이 화목하였으며 위선(爲先)하는데 정성을 다하여 묘의(墓儀:상석(床石) 비석(碑石) 등을 말함)를 일신(一新)하게 하였다. 매양 부모 산소에 잘못된 것이 있음을 걱정하여 항상 지사(地師)를 모시고 길지를 구하였는데 하나의 양지(良地)가 있어서 지사가 말하기를 소 한 마리를 폐백으로 바치면 하나의 명당(明堂)을 주리라 하였다. 이때 바야흐로 춘경기(春耕期)를 당하였는데 공이 즉시 사람으로 하여금 밭가는 소를 돌리어 곡식을 실어 보내니 그 지사가 경탄(驚歎)하여 깊이 사례하여 말하기를 세상에 어찌 진공(晉公)같은 사람이 있겠는가. 어버이 위하는 성의가 이 같으니 어찌 길지를 얻지 못하겠는가 하였다. 평거(平居:평소와 같음)에 항상 생업을 다스리었으나 사람들과 더불어 다툼이 없어 일호(一毫)의 자신을 이롭게 하고 사람을 해롭게 하는 일이 없었으며 나머지 가인(家人)을 어거하고 타인을 접대하는 예절은 다 이러한 예(例)로 하니 향당(鄉黨)에서 다 죽하는 진군자(眞君子)라고 칭도하였다. 마을 서당에서 글을 배울 때부터 사우(士友)를 좇아 놀기에 이르러 학문에 힘써서 부지런하게 즐기려 하였다. 성재 방용규(惺齋房容圭)와 하궤 윤영철(荷几尹永哲)과 서창 방택규(曙窓房澤圭)와 서파 김경식(西坡金敬植) 등 모든 분은 다 남중거벽(南中巨擘)인데 책상을 같이하여 공부한 제우(儕友)로 서로 더불어 토론하고 연마하여 여택(麗澤)이 미쳤으며 과거 보는 학문도 공부를 하였으나 또한 시장(試塲)에 나가는 것을 탐탁하게 여기지 아니하고 항상 말하기를 「선비가 하는 것이 어찌 사환일로(仕宦一路)일 따름이겠는가. 은거구지(隱居求志)하여 구부리어 땅을 보고 우러러 하늘을 보아도 부끄러움이 없는 것도 역시 학문 중 일사(學問中一事)이다.」 하고 소학(小學) 하나의 글을 마침내 마음의 글로 하였다. 간중(簡重:간결하고 무거운 것)하고 과묵(寡偈:말수가 적은 것)하여 성색(聲色)에 오염되지 아니하고 즐거움이 임천(林泉)에 있어 편안하고 한가롭게 구애됨이 없이 마음 내키는대로 지내었다. 집 근처에 요호(蓼湖)와 용산(龍山)의 아름다운 경치가 있어서 매양 오르고 임하여 잔을 기울이고 시를 읊으면서 소연(翛然)히 돌아감을 잊기도 하였다. 병상(病床)에 있어서 자질들을 불러 학업을 힘쓰고 효우를 서로 행하여 후손에게 전하며 부지런하고 검소하여 힘써 농사지어 선업(先業)을 폐기하지 말라고 유언하여 부탁하고 호연(浩然)히 이 세상을 깊이 떠나가니 기미년 8월 10일이다.

아! 인(仁)하면서 수를 못하고 현(賢)하면서 달하지 못하였구나. 공 같은 숙세(叔世:말세란 것)의 완인(完人)으로 수가 60을 차지 못하였으니 하늘의 이치를 믿지 못할 것이 과연 이 같은가. 묘는 구례군(求禮郡) 산동면 대촌(大村) 뒤 건(乾)을 등진 언덕이다. 배위 남양홍씨는 환충(煥忠)의 따님이니 곤의(壼儀:여자(女子)의 도리)에 결함이 없어 이웃과 마을이 어진 부인이라 다 칭도하였고 공이 유학할 때 내조가 많이 있었다. 공보다 3년 뒤에 돌아갔다. 1남 3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거하(巨夏)요 딸은 안경호(安慶鎬) 황덕현(黄德顯)과 김복술(金福述)에게 출가하였다. 거하가 문화 류씨(柳氏) 시영(時永)의 따님을 취하여 3남을 두었으니 규복(奎復), 규철(奎哲), 규장(奎璋)이니 규복의 아들은 원택(元澤)이다. 나머지 내외손증(內外孫曾)이 혹은 어리고 혹은 멀리 있어 다 기록하지 못한다.

나 형식(炯植)이 한 마을에 살고 있어 공을 모시고 논지가 오래되어 교회를 많이 입어 항상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하더니 하루는 거하(巨夏)군이 선적(先蹟) 한 권을 가지고 와 보이면서 말하기를 「우리 종족이 바야흐로 세고(世稿:대대로 오는 조상의 글)를 수집하는데 나의 돌아가신 아버님의 잠적유광(潛蹟幽光)을 길이 민멸해서는 아니되겠으니 자네는 나를 위하여 행장을 찬술하라.」 하거늘 내가 두려워하면서 말하기를 선공(先公)의 장덕문자(狀德文字)는 신중히 할 뿐만 아니라 마땅히 병필자(炳筆者)에게 청할 것이니 어찌 나 같은 문사(文辭)와 인망(人望)이 다 졸렬한 자에게 부탁을 하는가 모름지기 그대의 청을 감당하지 못할 뿐 아니라 둘의 처지가 다 실수가 되는 것이라고 말하니 「세상에 설혹 그런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선인행치(先人行治)의 시종을 자상히 아는 것은 형식 군과 같은 사람이 없으니 혐의적께 여기어 굳이 사양하지 말라」 하면서 부탁을 말지 아니하는 고로 간략하게 위와 같이 서술하여 뒷날 군자(君子)의 재택(裁擇)을 기다리노라.

  세차 을미(1955)년 11월 하순에

    월성 김형식(金炯植)은 삼가 장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