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

 

中樞院議官 雲泉公의 行錄 중추원의관 운천공의 행록

 

공(公)의 휘(諱)는 재관(在官)이요 자(字)는 경인(敬仁)이며 호(號)는 운천(雲泉)이고 성(姓)은 진씨(晉氏)로 남원(南原)이 본관(本貫)이시다.

시조(始祖) 함조(含祚)께서는 고려(高麗) 현종조(顯宗朝)에서 상서좌우복야(尙書左右僕射)를 역임(歷任)하셨고 현조(顯祖) 광인(光仁)께서는 명종(明宗) 때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를 지내셨으며 석(錫)께서는 고종조(高宗朝)에서 남원군(南原君)에 봉군(封君)되셨고 중시조(中始祖) 1世 효순(孝純)께서는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역임하셨으며 파조(派祖)이신 안(安)께서는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역임하셨다.

公께서는 정유(丁酉) 1897年 2月 17日 임실(任實)의 현곡촌(玄谷村)에서 23世 증통정대부(贈通政大夫) 태환 씨(泰煥氏)와 증숙부인(贈淑夫人) 천안전씨(天安全氏)와의 1男 2女 中 외아들로 출생(出生)하시어 어려서부터 총명영오(聰明넉悟)하고 품행(品行)이 아정(雅正)하며 효성(孝誠)이 극진(極盡)하여 타(他)의 귀감(龜鑑)이셨다. 성장(成長)하면서 근검(勤儉)으로 치산(治產)하고 종족(宗族)의 돈목(敦睦)과 위선사업(爲先事業)에 진성갈력(盡誠竭力)하여 평생(平生)을 헌신(獻身)하셨는데 막대(莫大)한 사재(私財)를 들여 영모재(永慕齋)를 건립(建立)하고 역대(歷代) 조상(祖上)의 묘(墓)에 석의(石儀)를 구비(具備)하였으며 제답(祭畓)을 매입(買入)하여 향사(享祀)를 원만히 봉행(奉行)할 수 있게 하였다. 1974年에는 시조공(始祖公) 이하(以下) 9位 향사답(享祀畓) 677坪을 헌성(獻誠)하였고 종친회 명예회장(宗親會名譽會長)으로 종친화합(宗親和合)과 모선사업(慕先事業)에 선도적(先導的) 역할(役割)을 하시는 등 공적(功績)이 지대(至大)하여 종원(宗員)과 세인(世人)의 존앙(尊仰)과 칭송(稱頌)을 받았다. 공직(公職)은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을 역임하셨고 일생(一生)을 자선(慈善)과 위선사업(爲先事業)에 전력(專力)하시다가 향수(享壽) 92歲를 일기(一期)로 1988年 무진(戊辰) 5月 28日 서거(逝去)하셨다.

배(配) 김해김씨(金海金氏)는 을미(乙未) 1895年 4月 18日에 득부 씨(得富氏)의 따님으로 태어나 일찍이 가훈(家訓)을 익히어 부덕(婦德)을 갖춘 현부(賢婦)로 부군(夫君)을 도와 숭조애족(崇祖愛族)과 범례(凡禮)의 도리(道理)를 다하니 가문(家門)이 화창(和暢)하였다. 계묘(癸卯) 1963年 11月 5日 종침(終寝)하시니 임실(任實)의 오정리(五亭里)山 37林 축좌원(丑坐原)에 안장(安葬)하였다가 後에 公과 쌍분(雙墳)으로 모시고 석의(石儀)를 구비(具備)하였다.

슬하(膝下)에 4男2女를 두셨는데 장남(長男) 상호(相鎬)는 밀양 박병연(密陽朴炳妍)을 맞아 영주(泳柱), 태주(兌柱), 창주(昌柱)를 낳고 2男 인호(仁鎬)는 김해 김막례(金海金莫禮)를 맞아 용욱(溶旭), 희철(䛥澈)을 낳았고 3男 경호(京鎬)는 창녕 정정희(昌寧丁貞姫)를 맞아 길주(吉柱), 연주(演柱), 현용(鉉湧), 연수(演琇)를 낳고 4男 영호(榮鎬)는 김녕 김이순(金寧金二順)을 맞아 용암(溶岩), 용석(溶碩)을 낳았다. 장녀(長女) 복희(福姫)는 장수 황의궁(長水黃義宮)에게 출가(出嫁)하고 2女 계순(季順)은 문화 류윤환(文化柳鈗煥)에게 출가(出嫁)하였다.

公께서는 근검(勤儉)으로 치부(致富)하고 자선(慈善)과 모선사업(慕先事業)에 아낌없이 사재(私財)를 들여 봉사(奉仕)함으로써 세인(世人)의 존앙(尊仰)을 받았으며 고위공직(高位公職)을 지냈고 장수(長壽)하였으며 자손(子孫)이 융성(隆盛)하니 수강(壽康) 부귀(富貴) 다남(多男)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의 영화(榮華)를 유감(遺憾)없이 누리시다. 그 영화(榮華)는 자손만대(子孫萬代)에 이어지고 그 功德(功德)은 길이 전해지면서 후세(後世)의 교훈(敎訓)이 될 것이다.

  세재(歲在) 을묘(乙卯) 1975年 復月上澣

    감무공후 종유사(監務公后宗有司) 창규(昌奎) 근기(謹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