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

 

農窩府君家狀 농와부군 가장

 

公諱鍾成字相源號農窩官  康陵叅奉系出南原南原君諱錫爲中祖文科濟州牧使諱嵩爲十八世祖曾祖諱成智  贈承政院右承旨祖諱丙元  贈嘉善大夫工曹叅判考諱太圭號松坡  贈同知中樞府事妣全州李氏士人東璉女  高宗丁丑四月十五日生公于南原府東植恩里第天資洵美自幼己知愛親之道時節魚果不先入口或於燕毛得一美味必袖而獻之承順唯諾左右周旋務以悅親爲事冬夏溫凊之節朝夕甘旨之奉身親監之無或使他或山而樵或水而漁殫誠竭力不由勉强親癠衣不解帶目不接睫行不正履憂形于色露禱北辰願以身代居憂哀毁如大小連闋服猶悒悒切切焉嘗戒珠鐸曰人子養親不一其端而養志爲先若事之可爲者父母不許則必委曲進達頷可而後行不可直遂其情以逆其心也又戒完鐸曰人生在世不通古今無異馬牛襟裾若通古今爲事則豈不在於多讀經傳耶嚴立課程以人一己十人十己百之心猛省精察做讀幷至以修身齊家爲主以昌吾門佘所區區之望也以賣田賣犢之錢多購書籍傳之而不肖才質鈍薄未得仰答遺訓之萬一不孝之罪安可逃也噫府君一生之事自治甚嚴內修旣篤以勤儉孝悌等字爲究題之目訓家人也以是勉後進也以是薄於自養而喜施於人宗族之貧而無依者鄉隣之㷀獨無托者則曰於我乎處賙恤保愛曲有恩義與伯氏議官公及其二弟鍾肅季弟監察公鍾喆友愛甚至長枕大被常居一室埍篪相樂有無共之和氣溢室秉心塞淵無巧造邪僞故人不敢以非義加之而對面不覺歛袵而起敬矣嗚噫公歿于甲午十二月八日而權窆于植恩里狐巖洞壬坐之原弔葬者雲集鄉隣宗族莫不垂淚配慶州金氏士人有權女剛柔配德治家有法先公歿于庚子三月十八日而葬于任實郡屯南面獒樹苧蘿山乾坐原生一男珠鐸繼配金海金氏士人龍元女生男一女五男卽不肖女長適慶州李鍾德次適全州李起旭次適金海金範斗次適南平文暢大次適金海金見浩完鐸生四男長曰永烈次曰永鎭次曰永文次曰永弼餘幼不盡錄噫公歿之明年刊刻世譜且刊先代懿蹟而府君之實行遺蹟未擧萬一沒失之罪惡可謝也姑擧大略如右以竣秉筆君子採云爾

  乙未  月  日      不肖孤完鐸泣誌于廬次

 

농와부군의 가장

공의 휘는 종성(鍾成)이요 자는 상원(相源)이며 호는 농와(農窩)니 관직은 강릉참봉이다. 세계는 남원에서 나왔으니 남원군 휘 석(錫)을 중조로 하였고 제주목사 휘 숭(嵩)이 18세조가 된다. 증조의 휘는 성지(成智)니 증승정원 우승지요 조부의 휘는 병원(丙元)이니 증가선대 부 공조참판이며 아버님의 휘는 태규(太圭)요 호는 송파(松坡)니 증동지중추부사요 어머님 전주이씨는 사인(士人) 동연(東璉)의 따님이다. 고종 정축년 4월 15일에 남원부 동쪽 식은리(植恩里) 집에서 낳으니 타고난 자품이 순수하고 아름다워 어릴 적부터 어버이 사랑하는 도리를 이미 알아서 시절에 나오는 고기와 실과를 먼저 입에 넣지 아니하고 혹 잔치집에서 하나의 아름다운 맛있는 음식물을 얻으면 반드시 소매 속에 넣어 가지고 와서 부모에게 드리었다. 어버이에게 승순(承順)하고 유락(唯諾:대답하고 실행하는 것)하며 좌우에서 주선하여 어버이를 기쁘게 하여 드리는 일을 힘써 하였으며 겨울과 여름에 따뜻하고 시원하게 하여드리는 절차와 조석으로 감지(甘旨)를 받드는 일을 몸소 친히 감독을 하고 혹 다른 사람을 시키지 아니하였다. 혹 산에서 나무도 하고 혹 물에서 고기도 잡아 부모봉양에 정성을 다하고 힘을 다하였는데 억지로 한 것이 아니다. 어버이 병환에는 옷은 띠를 풀지 아니하고 눈은 잠을 자지 아니하며 행하는데 신을 바로 신지 못하고 근심이 안색에 나타나 북두성에 기도하여 몸으로 대신 앓기를 원하였다. 상중에 있어서는 슬퍼하기를 대련 소련(大連小連:예기(禮記)에 있는 사람의 이름이니 대련(大連) 소련(小連) 형제가 효자로 집상(執喪)을 잘하였다)과 같았고 복을 벗은 뒤에도 오히려 슬퍼하면서 간절히 사모하시였다. 일찍이 주탁(珠鐸)을 경계하여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부모를 봉양하는데 그 방법이 일단(一端)이 아니나 양지(養志)를 우선으로 하는 것이니 만약 일을 가히 해야 될 것을 부모가 허락하지 않거든 간절히 그 이유를 진달하여 옳다는 허락을 받은 뒤에 실행할 것이고 그 뜻대로 직수(直遂)하여 부모의 마음을 어기는 것은 불가(不可)하다.」 하시었고 또 완탁(完鐸)을 경계하시어 말씀하시기를 「인생(人生)이 세상에 있어서 고금(古今)을 통하지 못하면 말과 소에게 옷을 입혀놓은 것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 만약 고금을 통하는 것으로 일을 한다면 이것이 어찌 경전(經傳)을 많이 읽는데 있지 아니하랴. 과정(課程)을 엄하게 정립(定立)하고 사람이 한 번 읽어 능하게 되면 나는 열 번 하여 능하고 사람이 열 번 읽어 능하게 되면 나는 百번 하여 능하겠다는 마음으로 써 맹렬히 반성하고 정밀하게 살피어 주행(做行)과 독서를 아울러 지극히 하여 수신제가(修身齊家)함으로써 우리 가문을 창대하게 하라. 이것이 내가 구구(區區)하게 바라는 바이다.」라고 하시었다. 그리하시고 밭을 팔고 송아지를 팔은 돈으로 서적을 많이 구입하여 전하시었는데 불초가 재질이 둔박하여 유훈(遺訓)의 만분지일을 우러러 보답하지 못하니 불효지죄를 어찌 가히 모면하겠는가.

아! 부군의 한평생 사업이 스스로 몸 다스리기를 심히 엄하게 하시고 안으로 수행하심이 이미 돈독하시어 근검효제(勤儉孝悌) 등의 글자로 구제지목(究題之目)으로 하여 가인(家人)을 훈계하는데도 이것으로 하시고 후진을 권면하는데도 이것으로 하시었으며 자양(自養)은 박하고 사람에게 베풀기를 좋아하시어 종족 중에 가난하여 의지할 곳이 없는 자와 향인(鄉隣) 중에 홀로 외로워 의탁할 곳이 없는 자는 말씀하기를 나에게 와서 있으라 하고 조휼보애(賙恤保愛)하여 곡진(曲盡)한 은의(恩義)가 있었다. 백씨 의관공 및 그 둘째 아우님 종숙(鍾肅)과 끝의 아우님 감찰공 종철(鍾喆)과 더불어 우애가 심히 지극하여 긴 베개와 큰 이불로 항상 한방에 거처하여 서로 즐겁게 지내면서 있고 없는 것을 공동으로 하여 화기가 집안에 넘치었다. 마음 가지기를 깊이 하시고 교조사위(巧造邪僞:공교롭게 지어 하고 간사한 거짓이란 것)가 없었던 고로 사람이 감히 옳지 못한 것으로 상대하지 못하였고 얼굴을 대하면 옷깃을 여미고 공경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아! 공이 갑오년 12월 8일에 돌아가시어 이백면 목가리 계평중록 화심간좌(二白面木街里桂坪中麓花心艮坐)에 권폄(權窆)하였는데 조장(吊葬)자가 구름같이 모이었고 향인 종족이 눈물을 흘리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었다. 배위 경주김씨는 사인(士人) 유권(有權)의 따님이니 강하고 부드러움이 덕에 맞고 집을 다스림이 법도가 있으시었으며 공보다 먼저 경자년 3월 18일에 돌아가시어 임실군 두남연 오수(獒樹) 저라산 건좌원(乾坐原)에 장례 모시었는데 1남 주탁(珠鐸)을 낳았고 계배(繼配) 김해김씨는 사인(士人) 용원(龍元)의 따님이니 1남 5녀를 낳으시었는데 1남은 즉 불초이고 5녀 중 장녀는 경주 이종덕(李鍾德)에게 출가하였고 2녀는 전주 이기욱(李起旭)에게 출가하였으며 3녀는 김해 김범두(金範斗)에게 출가하였고 4녀는 남평 문창대(文昌大)에게 출가하였으며 5녀는 김해 김견호(金見浩)에게 출가하였다. 완탁은 4남을 낳았으니 장남은 영렬(永烈)이요 차남은 영진(永鎭)이며 3남은 영문(永文)이요 4남은 영필(永弼)이니 나머지는 어려서 다 기록하지 아니한다.

아! 공이 돌아가시던 명년에 세보를 간행하였고 선대의 아름다운 사적을 간행하는데 부군의 실행과 유적(遺蹟)을 만 분의 1도 거술(擧術)하지 못하였으니 몰실(沒失)한 죄를 어찌 가히 면하겠는가. 아직 대략(大略)을 위와 같이 들어 기술(記述)하며 병필군자(秉筆君子)의 채택(採擇)을 기다리노라.

  을미(乙未) 1955년 월 일에

    불초고 완탁은 여차(廬次:상중 여막(廬幕)을 말한 것)에서 눈물 흘리며 기록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