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

 

石溪公墓碑文 석계공 묘비문

 

惟我十二世祖石溪公諱扶碩字大寬生而聰敏風采嶷峻兒時屹然有扶植網常碩人寬廣之志故因其志而肇錫云松堂公公大人而道學節義當世推重公過庭詩禮擩染旣深而又師事一蠹先生得其淵源德性淸儉造詣篤實學有緝熙于光明矣時方羣賢彙征以公德望乘運躍鱗蓋朝夕間事而上庠卽發軔也其在太學懇懇爲諸生解經義道理精熟無思不服乃黨之起見機南遯隱於龍城西文德峯下石溪遵養時晦其與貧戀利祿入而不知出者霄壤自不侔矣嶺湖以南爲進士者皆以公爲師公之本稿盡燼於兵燹惟其遺風餘韻口碑相傳百世不磨晉氏高麗尙書文敬公諱含祚爲鼻祖南原君諱錫以侍御史諱光仁子討捷契丹功存宗枋世圭組典工尙書英佐文科荼房成用學士于蘭望松堂虎老卽公高曾祖禰妣光山金氏考繼暘公以  世宗丙寅生庚寅擢進士丁未卒葬薇山南石溪北枕亥原配貞夫人南原梁氏大鉉女有婦德後公圽合封子豊瑞叅奉孫夢益  叅議承旨貞十世孫昌復  哲宗庚申文科授成均博士以公學行上言  贈嘉善大夫工曹叅判墓久闕顯刻十二世孫璣檜及庸主伐石而炳祺蕫其役不肖雖不文略擧其概銘曰

石潭湥源派流石溪超然見機德峯高棲南士思服自東自西學究天人綱維提撕不泯者存栗翁爲徒先生百世公與之齊

  歲在己卯仲春  十二世不肖孫瑩奉謹撰

 

석계공의 묘비문

오직 우리 12세조 석계공(石溪公)의 휘는 부석(扶碩)이요 자는 대관(大寬)이니 나면서 총명하고 민첩하였으며 풍채가 의젓하고 준수하였다. 아이 때에 홀연(屹然:우뚝한 모양)히 강상(綱常)을 부식하려는 석인(碩人)의 너그럽고 넓은 뜻이 있는 고로 그 뜻에 인하여 자(字)를 대관(大寬)으로 주었다. 송당공(松堂公)은 공의 대인(大人)이신데 도학절의가 당세의 추중(推重)되었다. 공이 가정 시례지교(詩禮之學)에 물들음이 이미 깊었고 또 일두 정선생(一蠹鄭先生)을 스승으로 섬기어 그 연원을 얻었고 덕성(德性)이 청검(淸儉)하고 조예(造詣)가 독실하며 학문은 광명(光明)에 집희(緝熙:밝은 모양)함이 있으셨다. 이 때 바야흐로 많은 현인들이 인군의 곁으로 나가는데 공 같은 덕망으로 운을 타고 재주를 날리는 것은 대개 조석간의 일이므로 상상(上庠)에 즉시 발인(發軔:출발하는 것)을 하시었다. 그가 태학에 있을 적에 간간(懇懇:정성스러운 모양)하게 제생(諸生)을 위하여 경의(經義)를 해석하는데 도리가 정숙(精熟)하여 생각하고 승복하지 아니하는 자가 없었다. 이에 당파가 일어나니 기회를 보고 남으로 내려가 용성(龍城) 서쪽 문덕봉(文德峯) 아래 석계상(石溪上)에 은거하여 도를 준행하고 뜻을 수양해서 때로는 재릉과 지혜를 숨기고 알지 못하게 하였으니 그 이록(利祿)을 탐하여 환로(宦路)에 들어가 나갈 줄을 알지 못하는 자와 더불어 비교한다면 소양(霄壤)이 스스로 같지 않은 것과 같다. 영호 이남(嶺湖以南)에서 진사가 된 사람들은 다 공으로 써 스승을 하였다. 공의 본고(本稿)가 병선(兵燹)에 다 소진(燒燼)되었고 오직 그 유풍여운(遺風餘韻)만이 구비(口碑)로 서로 전하여 백세(百世)에 갈리지 아니하였다.

진씨(晉氏)가 고려 때 상서 문경공 휘 함조(含祚)로 시조를 하였고 남원군 휘 석(錫)이 시어사 휘 광인(光仁)의 아드님으로 거란을 토평(討平)하여 공훈이 종방(宗枋:종묘사직(宗廟社稷)을 말한 것)에 있었다. 대대로 관직이 이어졌으니 전공상서 영좌(英佐)와 문과다방 성용(成用)과 학사 우란(于蘭)과 망송당 호로(虎老)는 즉 공의 고조, 증조, 조부, 아버님이시며 어머님은 광산김씨니 친정아버님은 계양(繼暘)이다. 공이 세종(世宗) 병인년에 출생하여 경인년에 진사로 발탁되시었고 정미년에 돌아가시어 미산(薇山) 남쪽이요 석계(石溪) 북쪽 해방(亥方)을 베개한 언덕에 장례 모시었고 배위 정부인은 남원양씨로 대현(大鉉)의 따님이니 부덕이 있었고 공보다 뒤에 돌아가 합봉하였다. 아들 풍서(豊瑞)는 참봉이요 손자는 참의 몽익(夢益)과 승지 정(貞)이다. 10세손 창복(昌復)이 철종 경신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박사에 제수되어 공의 학행을 상언(上言)하여 가선대부 공조참판을 증직하였다. 공의 묘소에 오랫동안 현각(顯刻)을 못하여 12世孫 기회(璣檜) 및 용(庸)이 벌석(伐石)을 주간하고 병기(炳祺)가 그 역사를 동독(蕫督)하였으며 불초 내가 비록 글을 못하나 그 대개(大槩)를 들어 간략하게 서술하고 명을 하여 가로되

석담(石潭) 깊은 근원의 파류(波流)가 석계(石溪)로 내려갔구나.

초연(超然)하게 기틀을 보아 덕봉(德峯)에 높이 깃드시었도다.

남방 선비가 사모하고 승복하여 동으로부터 서로부터 나갔었네.

학문은 천인지도(天人之道)를 강구하여 三강과 四유로 이끄시었지.

민멸하지 아니함이 있다면 율옹(栗翁)과 같은 분이시니

선생 백세(百世)에 공이 더불어 도학이 가지런하시리.

 

  기묘(1939)년 2월 12世

    불초손 영봉(瑩奉)은 삼가 찬술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