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

 

松溪公墓誌 송계공 묘지

 

薇山之陽兒馬洞有四尺之封惟我從八世祖  贈折衝將軍龍驤衛副司直諱承起字相輔號松溪公之藏也  肅廟辛卯三月五日生公自幼度量超凡孝奉兩親與伯仲㪅迭侍側溫凊之節甘旨之供靡不用極及遭外艱哀毀逾制幾至滅性七年後丁內艱哀毁之節亦如前喪平居持心處事一遵禮制同伯仲就師門受業專意講究且受敬字之訓爲不忘箴誠入孝出恭見聞者莫不歎賞系出高麗尙書文敬公諱含祚世以名德相傳侍御史公諱光仁生南原君諱錫討契丹大捷爲麗代元勳學士公于蘭生松堂虎老世有官蔭曾祖豊瑞將仕郞行  健元陵叅奉祖夢益  贈通政大夫工曹叅議考得省  贈通訓大夫軍資監正配淑夫人興城張氏叅奉文鉉女擧三男一女公其季也女適鄭千竹公晚年愛山水好賓客喜吟咏卜築精舍三棟于飛鴉嶝南麓扁以松溪秋月春風與同志親用嘉賓一咏一嘯散慮逍遙招集門子姪及村中子弟敎授不倦有和氣春風講磨不撤每當講會日高冠大帶端坐受講終日不怠學父兄齊會叅觀稱公之誠勤如是者二十有一年矣後人名其所曰松溪精舍遺墟名其峴曰書堂峴至於行人之諮嗟以雲仍之微弱故耳嗚呼享年六十七卒葬于先山壬坐原配淑夫人晉州姜氏父尙賢女有婦德同原合窆擧二男長逸載次明載著文行孫曾蕃衍不可盡錄公之事行曾聞於先丈老之相傳浹洽於耳者也公之十世孫炳祺致門丈老之命將伐石以公之狀行示余宜可徵信而文拙語訥未能致詳以待立言君子潤色焉

  歲壬辰三月  日    從八世孫庸謹撰

 

송계공 묘지

미산(薇山) 남쪽 아마동(兒馬洞)에 4尺 높이의 봉분이 있으니 이것은 우리 종8세조 증절충장군 용양위 부사직이신 휘는 승기(承起)요 자는 상보(相輔)며 호 송계(松溪)공의 장지이다. 숙묘 신묘년 3월 5일에 공이 출생하시었다. 어릴 적부터 도량이 보통보다 뛰어났으며 백형 및 중형과 더불어 서로 부모 곁에 모시고 있으면서 온청지절(溫凊之節)과 감지지공(甘旨之供)에 정성을 극진히 아니함이 없었고 외간상을 만나 애훼(哀毁)하시기를 예제에 지나쳐 거의 멸성(滅性:성명(性命)이 없어지는 것)에 이르렀었다. 7년 후에 내간상을 만나 애훼하는 절차를 전상(前喪)과 같이 하였다. 평소에 마음가짐과 일을 처리하는데 있어서 한결같이 예절을 준행하였고 백형 중형과 같이 사문(師門)에 나가 수업을 하였는데 강구(講究)하는데 뜻을 오로지하였고 또 경자지훈(敬字之訓)을 받아 불망잠(不忘箴)으로 해가지고 들어오면 효도하고 나가면 공손하기를 경계하니 보고 듣는 자가 탄상(歎賞)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었다.

세계(世系)는 고려 상서 문경공 휘 함조(含祚)에서 나와서 대대로 문덕(文德)을 서로 전하였다. 시어사공의 휘는 광인(光仁)이니 남원군 휘 석(錫)을 낳아 거란을 토벌하여 크게 이기어 여대 원훈(麗代元勳)이 되었고 학사공 우란(于蘭)이 송당 호로(虎老)를 낳아서 대대로 관음(官蔭)이 있었다. 증조 풍서(豊瑞)는 장사랑으로 건원릉 참봉을 행하였고 할아버님 몽익(夢益)은 증통정대부 공조참의이며 아버님 득성(得省)은 증통훈대부 군자감정이고 어머님 숙부인 흥성 장씨(張氏)는 참봉 문현(文鉉)의 따님이다. 3남 1녀를 두었으니 공은 그 끝에 분이시다. 1녀는 정천죽(鄭千竹)에게로 출가하였다. 공이 만년에 산수(山水)를 사랑하고 빈객을 좋아하며 음영(吟咏)을 즐거워하여 비아등(飛鴉嶝) 남쪽 기슭에 정사 3동(精舍三棟)을 건축하여 송계(松溪)로 편액(扁額)을 하고 가을달과 봄바람에 동지 친붕 가빈(同志親朋嘉賓)과 더불어 일영일소(一咏一嘯)하여 걱정을 흩어 버리고 사물에 구애받지 않고 즐겨 지냈으며 문중 자질가 촌중(村中) 자제들을 소집하여 교수(敎授)하기를 게을리 아니하시고 봄바람 같은 온화한 기색으로 강마하시기를 거두지 아니하셨다. 매양 강회(講會)날을 당하면 높은 갓과 큰 띠로 단정히 앉아 강을 받는데 해가 지도록 게을리 하지 아니하니 학부형들이 모두 모이어 참여하여 보고 공의 성근(誠勤)을 칭도하였는데 이같이 한 지가 20여 년이다. 후인이 그 곳을 이름하여 말하기를 송계정사의 유허(遺墟)라 하고 그 고개를 이름하여 말하기를 서당고개라고 하였으며 행인(行人)에 이르기까지 탄식을 하고 있으니 자손이 미약한 탓이다.

아! 향년 67에 졸하시어 선산(先山) 임좌원(壬坐原)에 장례 모시었다. 배위 숙부인은 진주강씨니 상현(尙賢)의 따님으로 부덕이 있었는데 같은 언덕에 합폄하였다. 2남을 낳았으니 장남은 일재(逸載)요 차남은 명재(明載)니 문행(文行)이 드러났다. 손자와 증손은 번연(蕃衍)하여 다 기록하지 아니한다. 공의 사적과 행검을 일찍이 돌아가신 장로(長老)들에게서 서로 전하는 말씀을 들어 귀에 익었다. 공의 10세손 병기(炳祺)가 문장로(門長老)의 명령으로 장차 돌을 다듬어 비석을 세우려고 공의 행장을 나에게 보이고 글을 청하였다. 내가 마땅히 증신(徵信)을 할 것이나 문장은 졸렬하고 말씀은 어눌하여 능히 자상하게 하지 못하고 입언군자(立言君子)의 윤색(潤色)을 기다리노라.

  임진(1952)년 3월 일에

    종八세손 용(庸)은 삼가 찬술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