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

 

察訪公墓碣銘 찰방공 묘갈명

 

嗚呼公我同庚也我忍銘公墓乎銘不可忍辭又不得撫事躕躇遂掩涕而書之公諱壽卿字仁老姓晉氏世家龍城粤在前朝有諱含祚左僕射謚文敬名顯麗史實惟公之鼻祖後孫如蘭珍原監務於公爲八代祖子自康生員武科軍資監判官子京童啓功郞子碩佐部將子繼楊承仕郞是爲公高祖曾祖諱起禎宣陵叅奉後老職三品祖諱益升考諱光賓隱德不仕妣南陽房氏左承旨德麟之孫郡守明選之女也以甲午正月十八日生公公資質溫惠盎然有儒雅之氣一鄉皆稱善士焉孝恭之行出於天得養生喪死人不間言奉九十歲祖母克盡甘旨之供愍岳君貧窮待之如親父兄蓋其能事不勉而然也衆歸賙給之美無間親疎逮乙丙大侵公豫計家口僅足新舊之繼擺落餘藏以周隣里鄉黨賴而全活者無等有賣重寶以廉價者或勸之買公掉頭曰吾志己定何可見小利而啓賣買之路哉此雖細事而可見其用心處也鄉人義之齊聲聞于官轉達于  朝授以通政大夫沙斤道察訪公固辭不己人益賢之丁丑十一月十三日感疾奄忽僅得年四十有四嗚呼痛哉遠近莫不驚歎曰善人亡矣葬于府西竹谷面犢山向巳之原配南原梁氏察訪普之玄孫儒士劼之女也有淑媛之德式爲好逑生同年月而日則先公十四後公十一年正月十七日卒與公同塋有三子長曰胤周次曰爾周三曰碩周長娶沈君壽咸女次娶梁生禹基女三娶叅奉李敬春女俱業儒噫以公之行義樂善宜享遐福而天嗇其壽未能爲流俗之勸惜哉然公之名庶幾不朽而三子又克家則視他空生天地死亦無聞且蔑後嗣續者相去相萬以此論之則古所謂天可必者其或近之而不足爲大嘆息也耶

銘曰有人如玉惟善之嗜孝以爲本所行者義衆歸其美天胡不遺我作此銘庶亦無愧

    通政大夫濟州牧使崔啓翁撰

    通政大夫承政院同副承旨兼經筵叅贊官春秋館修撰柳重茂書

 

찰방공의 묘갈

아! 공은 나의 동경(同庚:동갑(同甲)이란 말)이다. 내가 차마 공의 묘에 명(銘)을 하겠는가. 명도 차마 하지 못하게 되니 사연 또한 어찌 못하겠도다. 사적을 어루만지며 주저하다가 드디어 눈물을 닦고 쓰는 바이다. 공의 휘는 수경(壽卿)이요 자는 인로(仁老)이며 성은 진씨(晉氏)니 용성(龍城)의 세가(世家)이다. 전조(前朝)에 휘 함조(含祚)라는 분이 있는데 좌복야로 시호가 문경공인데 이름이 고려사에 드러났으니 실은 공의 시조이다. 후손 여란(如蘭)은 진원감무(珍原監務)니 공에게 8대조가 된다. 그의 아드님 자강(自康)은 생원으로 무과에 올라 군자감 판관이 되었고 그 아드님 경동(京童)은 계공랑이며 아드님 석좌(碩佐)는 부장이고 아드님 계양(繼楊)은 승사랑이니 이 분이 바로 공의 고조(高祖)가 된다. 증조의 휘 기정(起禎)은 선릉참봉인데 뒤에 수직(壽職)으로 3품에 올랐고 조부의 휘는 익승(益升)이고 아버님의 휘는 광빈(光賓)인데 덕을 숨기고 벼슬을 아니하였다. 어머님 남양 방씨(房氏)는 좌승지 덕인(德麟)의 손자요 군수 명선(明選)의 따님이다. 갑오년 정월 18일에 공을 낳으니 공의 자질이 온혜(溫惠)하여 앙연(盎然)히 선비의 기상이 있어 한 시골이 다 선사(善士)로 칭도하였다. 효도하고 공손한 행실은 하늘에 타고 나와 생존할 때 봉양하고 돌아가서 집상하는데 있어서 사람들이 부족하다는 말을 아니하였다. 90세가 되신 조모를 받드는데 감지지공(甘旨之供)을 능히 다하였고 악군(岳君:악부(岳父)를 말한 것이니 즉 장인이다)의 빈궁함을 민망히 여기어 대우하기를 친부형과 같이하였으니 대개 그의 능사로 힘쓰지 아니하여도 자연히 그렇게 되는 것이었으므로 주급(賙急)하는 미덕을 다 공에게 돌리어 친한 사람이나 소원한 사람이나 다른 말이 없었다. 을병년(乙丙年:乙亥 1695, 丙子 1696) 흉년에 공이 미리 가구수(家口數)를 계산하여 신년과 구년(舊年)을 이을 양곡을 계산하여 놓고 거기서 덜어서 남은 곡식을 저장하여 급한 사람을 도우니 인리향당(隣里鄉黨)이 그것을 힘입어 온전히 살아난 자가 계산할 수 없었다. 귀중한 보물을 염가로 파는 자가 있어서 혹인이 사두라고 권하니 공이 머리를 저으면서 말하기를 「나의 뜻을 이미 정하였으니 어찌 가히 적은 이익을 보고 매매(賣買)하는 길을 열겠는가.」 하였으니 이것이 비록 세소(細小)한 일이나 그의 마음 씀을 가히 볼 것이다. 고향 사람들이 의롭게 여기어 소리를 같이하여 관가(官家)에 알리고 조정에 상달(上達)하게 해서 통정대부 사근도 찰방(沙斤道察訪)을 제수하였는데 공이 고사(固辭)하여 말지 아니하니 사람들이 더욱 어질게 여기었다. 정축년 11월 13일에 병에 걸리어 돌아가니 겨우 44歲가 되었다.

아! 아프도다. 원근 사람들이 놀라고 탄식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이 선인(善人)이 죽었다고 말하였다. 부서(府西) 죽곡면(竹谷面) 독산(犢山) 사방(巳方)을 향한 언덕에 장례를 모시었다. 배위는 남원 양씨(梁氏)니 찰방 보(普)의 현손이요 선비 할(劼)의 따님인데 숙원(淑媛)의 덕이 있어 호구(好逑:좋은 배필이란 말)가 되었다. 출생은 연월이 같으나 날짜는 공보다 14일을 먼저 하였는데 공보다 11년을 먼저 해서 정월 17일에 졸하여 공과 무덤을 같이 하였다. 3자를 낳았으니 장남은 윤주(胤周) 2子는 이주(爾周), 3子는 석주(碩周)라고 한다. 장은 심군 수함(壽咸)의 따님을 취(娶)하였고 다음은 양생(梁生) 우기(禹基)의 따님을 취하였으며 3은 참봉 이경춘(李敬春)의 따님을 취하였으니 다 유학(儒學)을 업(業)으로 하였다. 공의 의리를 행하고 착한 것을 즐거워하는 것으로 본다면 마땅히 하복(遐福)을 느릴 것인데 하늘이 그 수(壽)를 아끼어 능히 유속(流俗)을 권계(勸戒)하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가석하다. 그러나 공의 이름이 거의 썩지 아니하고 세 아들이 그 집을 잘 다스리고 있으니 저 천지간에 공연히 출생해서 죽어서도 또한 명문(名聞)이 없고 또 뒤의 사속(嗣續)이 없는 자에게 비교해 본다면 서로 거리가 만리나 된다. 이것으로 써 논한다면 옛날에 이른바 「천가필(天可必:하늘은 가히 반드시 그리한다는 것)이라」고 한 것이 혹 근사하니 족히 크게 탄식할 것이 아니다. 명(銘)하여 가로되

 

사람이 옥 같은 분이 있어 오직 찬한 것을 즐기기만 하였지

효도로써 근본을 하였고 그 행한 바는 의리의 길 뿐이로세

모든 사람이 그 미덕을 돌리는데 하늘 어찌 주지 않았는가

내가 이 갈명(碣銘)을 지으니 거의 또한 부끄러움 없으리로다.

 

    통정대부 제주목사 최계옹(崔啓翁)은 찬하고

    통정대부 승정원 동부승지 겸 경연 참찬관 춘추관 수찬관     

    류중무(柳重茂)는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