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

 

梅湖堂公墓碣銘(幷序) 매호당공 묘갈명(병서)

 

公姓晉諱邦寧字伯述梅湖堂其號也以高麗戶部尙書兼左右僕射文敬公諱含祚爲始祖再傳諱錫討捷契丹有大勳封南原君事見金慕齋集  高麗末  諱如蘭珍原監務諱自康號龍庵才兼文武知略過人早登司馬軍資監判官三傳諱繼楊承仕郞諱起福  宣陵叅奉諱亨升成均生員諱秀賓  宣陵叅奉諱武卿  齊陵叅奉卽公之祖也公天性純厚事親至孝隆冬盛暑定省不懈志軆備養以副親心居喪築室墓下朝夕拜哭以奉三年不幸卒于廬室年三十六臨終只有七歲一子配光山金氏之泰女文正公沙溪諱長生十世孫有貞德卽欲下從上有七十老姑且有幼孤不能遂志家貧傭績困苦莫狀且子孫微弱未得褒彰然鄰里相傳自爲證參可謂衆口成碑矣事載三綱錄及郡誌今其五世孫炳曦抱狀遠來備述家象且曰聖訓孝始云身軆髮膚不敢毁傷世之斷指割股雖實極難然規以毁傷二字則亦難謂全孝云銘曰

公有孝思百行之則三載廬墓終始不忒誰非人子孰不好德有如不信請視斯刻

  甲午十月立冬節    完山崔秉心謹撰

 

매호당공의 묘갈명(병서)

공의 성은 진씨(晉氏)이요 휘는 방령(邦寧)이며 자는 백술(伯述)이니 매호당(梅湖堂)은 그의 호이다. 고려 호부상서 겸 좌우복야 문경공 휘 함조(含祚)로 시조를 하였고 2대를 전하여 휘 석(錫)은 거란을 토벌하여 대훈(大勳)이 있으므로 해서 남원군을 봉하였으니 이 사적이 김모재(金慕齋) 문집에 실려 있다. 고려조 말엽에 휘 여란(如蘭)은 진원감무를 지냈고 휘 자강(自康) 호 용암(龍庵)은 재주는 문무(文武)가 겸하였고 지략(智略)이 과인하였으며 일찍이 사마시에 올라 군자감 판관을 지냈다. 3대를 전하여 휘 계양(繼楊)은 승사랑이요 휘 기복(起福)은 선릉참봉이며 휘 형승(亨升)은 성균관 생원이요 휘 수빈(秀賓)은 선릉참봉이며 휘 무경(武卿)은 재릉참봉이니 즉 공의 조부이다. 공의 천성이 순후하고 지극한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기어 융동(隆冬) 성서(盛暑)에도 혼정신성(昏定晨省)을 게을리 하지 아니하였으며 뜻과 몸을 갖추어 봉양하여 어버이 마음에 들게 하였다. 상중에 있을 때 묘하에 집을 짓고 조석으로 배곡(拜哭)하여 3년을 받들었는데 불행히 여실(廬室)에서 졸하니 연세가 겨우 36세이다. 임종할 때 다만 7세 1자가 있을 뿐이다. 배위 광산김씨는 지태(之泰)의 따님이니 문정공 사계 휘 장생(長生)의 10세손이니 정덕(貞德)이 있어 즉시 하종(下從:남편을 좇아 죽음)하고자 하였으나 위로는 70 늙은이가 된 시어머니 있고 또 어린 고아(孤兒)가 있으므로 해서 능히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집안이 가난하여 품 팔고 길쌈 짜 그 고생은 일일이 형용할 수 없었다. 또 자손이 미약하여 표창을 얻지 못하였으나 인리(隣里)가 서로 전하여 스스로 증언을 하니 중구성비(衆口成碑:여러 사람의 입으로 전하는 것 비석을 이루었다는 것)라고 가히 말하겠다. 이 일이 삼강록과 군지(郡志)에 실려 있다. 지금 그의 5세손 병희(炳曦)가 그 가장(家狀)을 가지고 멀리 와서 집안 형편을 자상히 말하고 또 이르기를 「성훈(聖訓)에 효도의 시작은 신체발부(身體髮膚)를 감히 훼상(毀傷)해서는 아니 된다고 하였으니 손가락을 끊고 다리를 베는 것은 비록 지극히 어려운 일이나 훼상(毁傷) 두 글자로 규정(規定)한다면 역시 전효(全孝)라고 이르기는 어렵다」고 하였다. 명하여 가로되

 

공이 효도의 생각이 있어서 백 가지 행실의 법측이 되었지

3년 동안 여묘살이에 처음과 끝까지 어긋남이 없었네

어느 누가 자식이 아니며 또 누가 덕을 좋아하지 아니하리요

만약 믿지 못함이 있거든 청컨대 이 현각(顯刻)을 볼지어다.

 

  갑오(1954)년 10월 입동일에

    완산 최병심(崔秉心)은 삼가 찬술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