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

 

處士修軒公墓碣銘(幷序) 처사 수헌공 묘갈명(병서)

 

公諱大有字君得修軒私號也晉氏南原人也南原君諱錫后牧使嵩十世孫敬齋榮進曾孫白堂範疇孫雲菴龍采子也妣順天朴氏春成女甲辰五月七日生公天資英邁才藻超越年纔成童出就外傳通經史大義著述甚富早以親志累赴塲屋而未副焉則乃賦遂初閉戶讀古人書以卷中人爲千古尙友所著詩文皆有本有據藹然有曠世之感收拾不多只是斷簡殘篇然亦可知全鼎之味矣一生不拘於小節至於臨大事處大變則有截然不可及之量勇往邁進不少回避見阿諛奸回者疾之如雠必面折不貸故人皆畏憚不敢于以非道於戲公生乎長德之家孝弟其天植也學問其世業也將大其家聲而時命局之嵁巖而終識者恨之戊申十二月六日壽六十五而卒于正寝逾月葬于南原白波五柳里洞負丑之原配金海金氏士人八元女後公歿乾坐合窆生一男壽鳳以天職嘉善大夫戶曹叅判是生四男長房時協無嗣次房時和次房時泰次房時文時和四男成仁成義成禮成智成仁一男甲元成義一男學元壽通政成智四男丙元道元同敦寧溶元老職通政餘不錄公之八世孫珠鐸承鐸漢鐸完鐸竪石于阡道抱狀謁余不獲辭遂檃栝而歸之銘曰

閉戶讀書尙友千古不拔進退不輕喜怒正直剛明面折不貸遇事坦然了無窒礙一片靈臺氷壼秋水豊碑之刻永傳千禩

  旃蒙大淵獻大呂月下澣   蔚山金定中謹撰

 

처사 수헌공의 묘갈명(병서)

공의 휘는 대유(大有)요 자는 군득(君得)이며 수헌(修軒)은 사호(私號)이다. 진씨(晉氏)는 남원인이니 남원군 휘 석(錫)의 후예요 목사 숭(嵩)의 10대손이며 경재(敬齋), 영진(榮進)의 증손이요 백당(白堂), 범주(範疇)의 손자이며 운암(雲庵), 용채(龍采)의 아드님이다. 어머님 순천박씨는 춘성(春成)의 따님이니 갑진년 5월 7일에 공을 낳았다. 공의 타고난 자품이 영특하고 재주가 초월하여 겨우 성동(成童:15세를 말한 것)이 되어 바깥 스승에게 나가 공부를 해서 경사(經史)의 대의를 통하고 저술이 심히 많았다. 일찍이 어버이의 뜻으로 여러 번 과장(科塲)에 나갔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므로 이에 과거를 중지하고 초지(初志)로 돌아와 문을 닫고 고인의 글을 읽어 권중인(卷中人)으로써 천고(千古)에 존승하는 벗을 하였으며 저술한 시문(詩文)이 다 근본이 있고 증거가 있어서 애연(藹然)하게 광세지감(曠世之感:세상에 뛰어난 감상)이 있었는데 수습하기를 많이 하지 못해서 다만 단간(斷簡) 잔편(殘篇)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역시 전정(全鼎)의 맛을 가히 알 것이다. 일생 소절(小節)에는 구애하지 아니하고 대사(大事)를 임하고 대변(大變)을 처리하는데 이르러서는 절연(截然)하게 가히 미치지 못할 도량이 있어서 용왕매진(勇往邁進)하여 조금도 회피하지 아니하였고 아첨하고 간사한 자를 보면 미워하기를 원수같이 하여 반드시 면절(面折)하고 용서하지 아니하였다. 그런 고로 사람들이 다 두려워하고 감히 간청(干請)하지 못하였다.

아! 공이 장덕지가(長德之家)에 출생하여 효제(孝悌)는 하늘에서 타고 났고 학문은 그의 세업(世業)이니 장차 그 가문의 명성을 크게 할 것인데 시명(時命)이 국한되어 감암지하(嵁巖之下)에서 세상을 마치니 아는 사람들은 다 한탄하였다. 무신년 12월 6일에 수 65세로 점침에서 졸하여 다음 달 남원 백파(白波) 오류리동(五柳里洞) 축방을 등진 언덕에 장례 모시었다. 배위 김해김씨는 사인(士人) 팔원(八元)의 따님이니 공보다 뒤에 돌아가 건좌(乾坐)에 합폄하였다. 1남 수봉(壽鳳)을 낳았는데 천직(天職)으로 가선대부 호조참판이며 이가 4남을 낳았으니 장방은 시협(時協)인데 아들이 없고 2방은 시화(時和)며 3방은 시태(時泰)요 4방은 시문(時文)이다. 시화는 4남을 두었으니 성인(成仁), 성의(成義), 성례(成禮), 성지(成智)요, 성인의 1남은 갑원(甲元)이며 성의의 1남은 학원(學元)이니 수직으로 통정(通政)이고 성지의 4남은 병원(丙元)과 동돈녕 도원(道元)과 노직(老職)으로 퇴정(退政)한 용원(溶元)이다. 나머지는 기록하지 아니한다. 공의 8대손 주탁(珠鐸), 승탁(承鐸), 한탁(漢鐸), 완탁(完鐸)이 천도(阡道)에 비석을 세우려고 가장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글을 청하므로 명하여 가로되

문을 닫고 글을 읽으면서 위로 천고인(千古人)을 벗으로 하였네

나가고 물러감을 빨리하지 않고 기뻐하고 노함을 가벼이 않았지

정직하고 강명(剛明)하여 간사한 자는 면대하여 끊고 용서하지 않았으며

일을 당하면 평탄하게 처리하여 조금도 구차하고 막히는 것이 없었도다.

일편영대(一篇靈臺)인 그 마음 빙호추수(冰壺秋水)와 같으셨지

풍족한 비석에 현각(顯刻)하여 천년을 길이길이 전하리로세

 

  을해(1935)년 12월 하순에

    울산 김정중(金定中)은 삼가 찬술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