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

 

小松公墓碣銘 소송공 묘갈명

 

晉氏南原人高麗  顯宗朝諱含祚尙書僕射歷諱光仁殿中侍御史桓桓曰錫封南原君討捷契丹爲麗元勳穆穆學士自靖杜門翼翼松堂先節克遵諱扶碩工叅之贈圭組世芬至諱順應監察亦榮曾祖廷表孝文有聲祖曰允復考曰國明三世繼孝鄕里高評妣平澤林氏早卒無遺繼妣全州李氏有德五兒公諱璣完初諱瑩奉寶汝其字序居第四淸粹樂易惟我大韓  高宗庚辰十月五日生芳洞鄰性本敏悟又憵讀書漁樵供旨工篤三餘經史輪通汪洋文波弱冠己亥贄謁松沙得號小松父師是宗構齋勤敎四學不容國讎未復終身戴白癸卯庚午兩艱誠極一生所著讓古不傳嗟此謙謙曷本賢焉己丑臘二正終于寝葬于芳洞里塔谷枕壽七十寔公大槩南原梁氏實爲賢配洛權之女提學堅后孝旭景旭乃公二男四女適于朴李金梁門人賁墓山高水長我銘厥德傳諸無疆

  丙申元月驚蟄節    完山崔秉心撰

 

소송공의 묘갈명

진씨(晉氏)는 남원인이니 고려 현종조 때 휘 함조(含祚)는 상서복야요 휘 광인(光仁)은 전중시어사이며 환환(桓桓:굳세고 강한 모양이니 시경(詩經)에 환환무사(桓桓武士)란 귀절이 있음)한 분은 석(錫)이라고 하는데 남원군을 봉하였으니 거란을 토벌하여 여조의 원훈(元勳)이 된 탄이다. 목목학사(穆穆學士)는 두문동에 들어가서 정절을 지켰고 익익송당(翼翼松堂)은 선대의 정절을 능히 준행하였으며 휘 부석 공조 참판의 증직은 규조(圭組:벼슬아치의 표식) 대대로 아리따웠도다. 휘 순응(順應)에 이르러서는 감찰이 또한 영화로웠고 증조 정표(廷表)는 효도와 문학으로 성명이 있었으며 할아버님은 윤복(允復)이라 하고 아버님은 국명(國明)이라고 하는데 3대가 효도를 이어 향리(鄉里)에서 높이 평가하였다. 초비(初妣)는 평택 임씨(林氏)니 일찍이 돌아가 자녀가 없고 계비(繼妣) 전주이씨가 덕이 있어 다섯 아이를 낳았다. 공의 휘는 기완(璣完)이며 초휘는 영봉(瑩奉)이고 보여(寶汝)는 그의 자(字)니 서열은 제 4에 있었고 청취낙이(淸粹樂易)하였다. 우리 대한(大韓) 고종 경진 10월 5일에 방동(芳洞)에서 출생하였으며 성품이 본래 민첩하고 영리하였으며 독서의 성벽이 있었다. 고기 잡고 나무하여 어버이에게 감지(甘旨)를 바치었고 3여(三餘:독서하기 좋은 세 여가이니 겨울과 비 오는 날의 남음을 삼여(三餘)라고 한다)에 독실히 공부하여 경사(經史)를 다 통하여 문파(文波)가 왕양(汪洋)하였으며 약관(弱冠)이 되는 기해년에 송사(松沙) 奇선생의 문하생으로 주제자가 되어 소송(小松)이란 호를 얻었다. 아버님과 스승을 종통으로 하고 집을 지어 부지런히 제자를 교육하니 나라의 사학(四學)이 용납되지 못하였다. 나라의 원수를 갚지 못하였다는 것으로 몸이 마치도록 흰 갓을 썼고 계묘년과 경오년 내외(內外) 양간상(兩艱喪)에 정성을 지극히 하였으며 일생의 저술한 글은 옛날 사람에게 양보하고 전하지 않았다. 슬프다. 이 겸손하고 겸손한 것이 어찌 어질지 아니하신가. 기축년 12월 2일에 침실에서 돌아가시어 방동리(芳洞里) 山49一林에 장례 모시었으니 수가 70이다. 이것이 공의 대개(大槩)이다. 남원 양씨(梁氏)가 실은 어진 배위니 낙권(洛權)의 따님이요 제학 견(堅)의 후손이다. 효욱(孝旭)과 경욱(景旭)은 공의 두 아들이요 4녀는 박씨, 이씨, 김씨, 양씨 네 가문 사람에게 출가하였다. 문인(門人)들이 묘를 아름답게 꾸미니 산은 높고 물이 길이 흐름과 같도다. 내가 그 덕은 명(銘)하여 끝없이 전하노라.

  丙申(1956)년 1월 경칩절에

    완산 최병심은 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