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

 

判公墓碣銘(幷序) 참판공 묘갈명(병서)

 

余嘗勸豪傑之士或少拘檢孝悌之家不尙文華蓋其所性不同而氣爲之局也近世有醉隱晉公謹飭于躬勤儉于家篤行堅持繩尺不踰而乃自放於詩酒自號爲醉隱以寓其趣而歛其跡若此者君子而達人也求之古今罕其儔矣公諱必仲字敬伯南原人尙書左僕射文敬公諱含祚爲鼻祖世仕麗朝爲顯官兵曹判書諱安始仕本  朝六傳至嘉善大夫諱璉徙居子任實卽公八世祖曾祖諱英彙號石溪  贈司僕正祖諱邦澤號雲崗  贈友承旨考諱昇祿號蘭田  贈戶曹叅判妣  贈貞夫人金海金氏允翼女繼妣貞夫人光山金氏慶麟女公生  憲宗己亥四月十三日幼失怙能哀號爲終身慟事偏母志體備養病而盡醫藥禳禱之誠喪而盡戚易葬奠之節鄉黨稱純孝與諸兄不析居不私蓄事嫂尤敬親戚鄰里之貧匱者輒竭力周之皆出於至誠也居常莊容貌簡言笑崇文學尤善詩詞筆藝亦絶人座右揭正衣冠尊瞻視言忠信行篤敬十二字恒目之自警曰若有間斷心馳千里莫知其嚮可不畏哉敎子孫勉後進亦以是使之無敢放過時或與用舊爲樂觴詠暢適窮日夜而不知疲遇花朝月夕及山水佳處欣欣有自得之意不知老之將至也  高宗乙酉三月二十一日卒得年僅四十七士友莫不慨惜葬郡之上新德面上加里前麓癸坐原後  贈戶曹叅判兼同知義禁府事以子貴也配貞夫人寧越嚴氏基燾女端莊有懿範夫子宜之後公一年卒墓在大谷面杜浦里後麓  坐擧六男導曄嘉善權曄陽曄議官宗曄瓘曄午曄孫在膺在祐在宣導曄出在炳在寶李東錫梁完容徐儀甲梁承祚妻權曄出在桓在民金東宰妻陽曄出在甲在丁在乙李東鉉妻瓘曄出在德午曄出曾孫焱鍾華鍾喜鍾王鍾金永坤妻在膺出集鍾在祐出林鍾善鍾洪鍾東鍾在宣出源鍾在炳出章鍾相鍾警鍾在寶出京鉉承鉉在桓出忠鉉文鉉明鉉瓅鉉正鉉己鉉在民出餘幼不悉錄瓘曄君袖其伯兄所撰家狀而來謁余文且道近日以士論配公于泰仁道義祠故幷記之繼之以銘曰

香山自號醉唫廬陵自號醉翁之二公豈以醉自命者聊且寓樂於其中千載下疇其似之于嗟乎醉隱晉公吁嗟乎晉公㪅誰與同

    嘉善大夫前行奎章閣副提學東萊鄭萬朝撰

 

참판공의 묘갈명(병서)

내가 일찍이 보건대 호걸지사는 구검(拘檢:언행(言行)을 구속하여 경계하고 타이름)하는 것이 적고 효제지가는 문화(文華:문장의 화려함과 또는 외면치레)를 숭상하지 아니하나니 대개 그 타고난 성품이 같지 아니하고 기질의 국한된 탓이다. 근세(近世)에 취은 진공(醉隱晉公)이라는 분이 있어 몸을 삼가 신칙하고 집을 부지런히 검소하게 단속하며 행실은 도타이 하고 지조를 굳게 하여 승척(繩尺:먹줄같이 곧고 자같이 정확한 것을 말함)을 조금도 넘지 아니하면서 이에 시주(詩酒)에 스스로 방일(放逸:마음대로 거리낌 없이 노는 것)하여 자호를 취은(醉隱)이라고 해서 그 취미를 붙이고 자취를 감추었다. 이 같은 사람은 군자이면서 달인(達人)이니 고금에서 구해도 그 짝이 드물다. 공의 휘는 필중(必忡)이요 자는 경백(敬伯)이며 남원인이니 상서 좌복야 문경공 휘 함조(含祚)가 시조가 되었고 대대로 여조에 벼슬하여 현관이 되였다. 병조판서 휘 안(安)은 비로소 본조에 벼슬을 하였고 6대를 전하여 가선대부 휘 연(璉)에 이르러 거주지를 임실로 옮기었으니 즉 공의 8세조이다. 증조의 휘는 영휘(英彙)요 호는 석계(石溪)니 사복시정을 증직하였고 조부의 휘는 방택(邦澤)이요 호는 운강(雲崗)이니 좌승지를 증직하였으며 아버님의 휘는 승록(昇祿)이요 호는 난전(蘭田)이니 호조참판을 증직하였고 초비(初妣) 증정부인 김해김씨는 윤익(允翼)의 따님이요 계비(繼妣) 정부인 광산김씨는 경인(慶麟)의 따님이다. 공이 헌종 기해년 4월 13일에 출생하여 어려서 아버님을 잃고 능히 애호(哀號)하여 몸이 마치도록 절통(切慟)하였으며 편모(偏母)를 섬기는데 있어서 뜻과 몸을 갖추어 봉양하여 병환에는 의약 및 기도하는 정성을 다 하였고 상사(喪事)에는 척애(戚哀) 및 장전(葬奠)하는 예절을 다하니 향당(鄉黨)에서 순수한 효자라고 칭도하였다. 형제와 더불어 분거(分居)를 아니하고 사축(私蓄:재물을 사사로이 저축하는 것)을 아니하였으며 형수 섬기는데 공경을 더욱 바치었고 친척과 인이(麟里)의 빈궁한 자에게는 문득 힘을 다하여 도와주었으니 다 지성에서 나온 것이다. 평거(平居)에 항상 용모는 엄숙하게 하였고 언소(言笑)는 간약하게 하였으며 문학을 숭상하되 시사(詩詞)를 더욱 잘했었고 필예(筆藝) 또한 절인(絶人)하였다. 정의관(正衣冠) 존첨시(尊瞻視) 언충신(言忠信) 행독경(行篤敬) 열두 글자를 좌우에 걸어놓고 항상 눈으로 보아 스스로 경계하여 가로대 「만약 간단(間斷)함이 있으면 마음이 천리 밖으로 달려가 그 방향을 알지 못할 것이니 가히 두렵지 아니하겠는가.」 하였다. 그리고 자손을 교훈하고 후진을 권면하는데도 역시 이것으로 하여 감히 방과(放過)함이 없게 하였다. 때로는 혹 옛 친구들과 더불어 즐겁게 지내면서 술을 기울이고 시를 읊조리어 창달(暢達)하면서 일야(日夜)를 계속해도 피로를 알지 못하였고 꽃피는 아침과 달 돋는 저녁 및 산수(山水)의 아름다운 곳을 만나면 흔흔(欣欣:기뻐하는 모양)하게 자득(自得)하는 뜻이 있어서 늙음이 장차 오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고종(高宗) 을유년 3월 21일에 졸하니 겨우 47의 연세를 얻어 사우가 개석(慨惜)하게 여기지 아니하는 자가 없었다. 군지상(郡之上) 신덕면 상가리 전록(前麓)의 계좌원(癸坐原)에 장례 모시었다. 그 뒤에 호조참판 겸 동지 의금부사를 증직하였으니 아들의 귀(貴)로 된 것이다. 배위 정부인 영월 엄씨(嚴氏)는 기도(基燾)의 따님이니 단장(端莊)하고 의범(懿範)이 있어 부군이 마땅하게 여기었는데 공보다 1년 뒤에 졸(卒)하였고 묘는 대곡면(大谷面) 두포리 뒷산 ○○좌에 있다. 6남을 낳았으니 도엽(導曄)은 가선이요 권엽(權曄)과 양엽(陽曄)은 의관이며 종엽(宗曄)과 관엽(瓘曄)과 오엽(午曄)이다. 손자 재응(在膺), 재우(在祐), 재선(在宣)은 도엽이가 낳았고 재병(在炳), 재보(在寶)와 이동석(李東錫)의 아내와 양완용(梁完容)의 아내와 서의갑(徐儀甲)의 아내와 양승조(梁承祚)의 아내는 권엽이 낳았으며 재환(在桓), 재민(在民)과 김동재(金東宰)의 아내는 양엽이 낳았고 재갑(在甲), 재정(在丁), 재을(在乙)과 이동형(李東鉉)의 아내는 관엽이 낳았으며 재덕(在德)은 오엽이 낳았다. 증손에는 염종(焱鍾), 화종(華鍾), 희종(喜鍾), 왕종(王鍾)과 김영곤(金永坤)의 처는 재응이가 낳았고 집종(集鍾)은 재우가 낳았고 임종(林鍾), 선종(善鍾), 홍종(洪鍾), 동종(東鍾)은 재선이가 낳았고 원종(源鍾)은 재병이가 낳았고 장종(章鍾), 상종(相鍾), 경종(警鍾)은 재보가 낳았고 경현(京鉉), 승현(承鉉)은 재환이가 낳았고 충현(忠鉉), 문현(文鉉), 명현(明鉉), 낙현(瓅鉉), 정현(正鉉), 기현(己鉉)은 재민이가 낳았으며 나머지는 어려서 다 기록하지 아니한다. 관엽이 그 백형(伯兄)이 찬술한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글을 청하고 또 근일에 사림의 공론으로 태인 도의사(道義祠)에 공을 배향하였다고 하기에 아울러 기록한다. 계속하여 명을 하여 가로되

 

향산(香山:당(唐)나라 백낙천(白樂天)의 별호이다)이 취음(醉唫)이라 스스로 호를 하였고

여릉(廬陵:송(宋)나라 구양수(歐陽脩)의 호이다)이 취옹(醉翁)이라 스스로 호를 하였지

저 이공(二公)이 어찌 취자(醉字)로 스스로 명(命)한 것이겠는가.

애오라지 즐거움을 그 가운데 붙인 것이로다.

천년 아래에 와서 누가 그 분들과 같은고

아! 취은 진공(醉隱晉公)이로다

아! 진공과는 또다시 누가 같겠는가.

 

    가선대부 행 규장각 부제학 동래 정만조(鄭萬朝)는 찬술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