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

 

贈貞夫人寧越嚴氏墓碣銘(幷序) 증정부인 영월엄씨 묘갈명(병서)

 

嗟乎此  贈貞夫人寧越嚴氏之藏也氏忠毅公諱興道裔同樞致蕃曾孫士人永祚女  高宗朝文科兵曹叅議錫瓘之妹  憲廟戊戌十二月二十八日生歸  贈嘉善大夫戶曹叅判醉隱晉公必仲晉系南原有諱安兵判始仕本  朝嘉善諱璉始居任實是其八世己上諱重明諱英彙可僕正諱邦澤左承旨諱昇祿  贈戶叅爲高曾祖禰四世此夫家世德也夫人婉媤端嚴有女士風公孝事偏母帮助竭誠進隨滫視帬踰躬執不委諸卑幼其孝於尊嫜有如此公好觴咏不屑產業而持家甚健客至觴豆必有實必敬君子有如此兄弟不析著庭無間言族隣貧匱傾困無恡色其友睦亦多類此此其事行之萬一丙戌六月二十六日卒葬大谷面杜浦里後麓枕庚原公墓新德面上加里癸坐育六男導曄都正權曄陽曄議官宗曄瓘曄午曄孫在膺在祐在宣導之出在炳在寶李東錫梁完容徐儀甲梁承祚妻權之出在桓在民金東宰妻陽之出在甲在丁在乙李東鉉妻瓘之出在德午之出在膺四男焱鍾華鍾喜鍾王鍾在祐一男集鍾在宣四男林鍾善鍾洪鍾東鍾在炳一男源鍾在寶三男章鍾相鍾警鍾在桓二男京鉉承鉉在民六男忠鉉文鉉明鉉瓅鉉正鉉己鉉內外曾玄繁不盡錄噫按狀發唏可謂有是夫有是婦天若假之年其爲柯則奚止於一家抑將需于一國矣嗇於躬豊于後旣有古語今瓘曄甫之追述孝思足徵芝醴之有根有源其後仍之蕃衍昌大亦豈可涯量也哉佘不喜爲此文而重孤孝孫之懇略加檃栝係之一言曰

靈有芝醴菀彼松竹曰孝曰睦惟家之蓄龍翔鳳翥兒孫岐嶷嗇躳豊後理罔或忒璜聲蹌蹌來掃塋域凡百女士視此片石

  歲戊辰之仲夏

    嘉善大夫弘文館副提學  原任奎章閣侍敎藝文館檢閱知製誥全州李範錫撰

 

증정부인 영월엄씨 묘갈명(병서)

아! 이것은 증정부인 영월엄씨가 묻힌 묘소이니 충의공 휘 흥도(興道)의 후예로 동추 치번(致蕃)의 손녀요 사인 영조(永祚)의 따님이니 고종조 때 문과에 올라 병조참의를 지낸 석관(錫瓘)의 매씨이다. 헌종 무술년 12월 28일에 출생하였고 증가선대부 호조참관 취은 진공(醉隱晉公) 필중(必仲)에게 우귀(于歸)하였다. 진씨의 선계(先系)는 남원이니 휘 안(安)은 병조판서인데 비로소 본조(本朝)에 벼슬하였고 가선의 품계에 오른 휘 연(璉)이 비로소 임실(仕實)에 거주하였으니 이 분들이 그의 8세 이상이시다. 휘 중명(重明)과 휘 영휘(英彙) 사복정과 휘 방택(邦澤) 좌승지와 휘 승록(昇祿) 증호조참판이 고조, 증조, 조부, 아버님 4대이니 이것이 부가(夫家)의 세덕(世德)이다. 부인이 유순하고 단정하며 엄숙해서 여사(女士)의 풍도가 있었다. 공이 효도로 편모(偏母)를 섬기는데 성의를 다하여 도왔고 음식을 드리고 의복을 돌보아 몸소 집행하며 어린 하인들에게 맡기지 아나하였으니 그 시어머님에게 효도하기를 이같이 하였다. 공이 시주(詩酒)를 좋아하고 산업(產業)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는데 부인이 가정을 심히 건실하게 다루어 객(客)이 이르면 주효(酒肴)가 반드시 장두(觴豆)에 차 있었으니 그 군자(君子)를 공경함이 이 같았다. 형제살림을 나지 않고 한집에 살았으나 이간하는 말이 없었고 겨레와 이웃의 가난한 사람에게는 창고를 기울여 도와주는데 인색한 빛이 없었으며 그 우애와 친목 또한 이 같은 것이 많았으니 이것은 그 사행(事行)의 만분지 일이다. 병술년 6월 26일에 돌아가시어 대곡면(大谷面) 두포리 뒷산 경방(庚方)을 베개한 언덕에 장례 모시었고 공의 묘는 신덕면(新德面) 상가리 계좌에 있다. 6남을 길렀으니 도엽(導曄)은 도정이요, 권엽(權曄)과 의관 양엽(陽曄)과 종엽(宗曄)과 관엽(瓘曄)과 오엽(午曄)이다. 손자에 재응(在膺), 재우(在佑), 재선(在宣)은 도엽이 낳았고 재병(在炳), 재보(在寶)와 이동석(孝東錫), 양완용(梁完容), 서의갑(徐儀甲), 양승조(梁承祚)의 처는 권엽의 소생이요. 재환(在桓), 재민(在民), 김동재(金東宰)의 처는 양엽의 소생이요. 재갑(在甲), 재정(在丁), 재을(在乙)과 이동현(李東鉉)의 처는 관엽의 소생이요. 재덕(在德)은 오엽의 소생이다. 재응은 4남이니 염종(焱鍾), 화종(華鍾), 희종(喜鍾), 왕종(王鍾)이요. 재우는 1남을 두었으니 집종(集鍾)이요. 재선은 4남을 두었으니 임종(林鍾), 선종(善鍾), 홍종(洪鍾), 동종(東鍾)이요. 재병은 1남을 두었으니 원종이요. 재보는 3남을 두었으니 장종(章鍾), 상종(相鍾), 경종(警鍾)이요. 재환은 2남을 두었으니 경현(京鉉)과 승현(承鉉)이요. 재민은 六남을 두었으니 충현(忠鉉), 문현(文鉉), 명현(明鉉), 낙현(瓅鉉), 정현(正鉉), 기현(己鉉)이다. 내외 증현손은 번성하여 다 기록하지 못한다.

아! 가장을 살피건대 이 남편에 이 아내가 있다고 가히 이르겠도다. 하늘이 만약 그 연세를 좀 더 빌려 주었다면 그 모범됨이 어찌 일가(一家)에서 그치었겠는가. 장차 일국(一國)에 수용되었을 것이다. 몸에는 인색하고 후대에게 풍부하게 한다는 것이 이미 옛말이 있었다. 지금 관엽씨의 추술(追述)하는 효사(孝思:효성스러운 생각)는 지초(芝草)와 예천(醴泉)의 뿌리가 있는 것을 족히 증험할 것이니 그 후손의 번영하고 창대함이 어찌 가히 끝이 있겠는가. 내가 이러한 글 짓는 것을 좋아 아니하나 효손(孝孫)의 간청을 중히 여기어 간략히 교정을 하고 이어서 일언(一言)으로 명(銘)하여 가로되

 

영지(靈芝)와 예천(醴泉)같은 근원이 있음이여 저 울창한 송죽같이 자손이 번성하구나

효자(孝子)로 되고 목족(睦族)도 되었다고 말하겠으니 오직 가중 교육으로 축적되었지

용이 돌고 봉이 나르는듯한 아손(兒孫)의 재능이 뛰어나 있었으니

몸에는 인색하였지만 후손에게 풍후하다는 이치가 틀리지 않았구나

옥 같은 돌을 움직이는 소리 창창(蹌蹌)하니 자손이 와서 묘소를 쓰는 것이로세

무릇 모든 여사(女士)들은 이 편석(片石)을 보면 부인을 알아 존경하리로다.

  무진(1928)년 오월에

    가선대부 홍문관 부제학 원님 규장각 시교 예문관 검열 지제고

    전주 이범석(李範錫)은 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