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

 

時思齋記 시사재기

 

時思者天時有序而變遷人心有思而感發出於性善之理也思傳云思誠者人之道也爲人之道莫大於事親奉祭也盡事親之孝追遠而奉先祖之祭隨時而思思盡其誠也惟我晉氏貫南原自麗迄我多有偉蹟世稱東邦華族矣上自文敬公諱含祚侍御公諱光仁南原君諱錫禮部尙書公孝純典工尙書公英佐左衛公諱成用皆我顯祖累世墳墓盡失於兵燹之中爲後承者不能無痛恨之心也惟珍原公諱如蘭龍菴公諱自康以下十四五世祖先墓在於楓岳之南修德峰之西竹谷栗亭周浦鵲嶺大谷犢山楓山瓦山而春雨秋霜必有怵愓悽愴之心思其如將之誠省松楸奉祀事芬苾旣備堂構未成諸孫之茹恨久矣是歲之春宗議僉同新剏一齋於康可洞伴松亭公墓下不日而告成藏籩豆於斯會子姓於斯旣落扁以時思蓋取諸祭統觀其敬以時思之義也齋舍竣功之日嗟佘不肖雖不文不可啣偈故記此拙辭勸我後人本支百世思其先祖致誠而不忘則是乃爲子孫之道也云爾

  歲在丁亥暮春上澣  不肖后孫慶夏謹撰

 

시사재 기문

시사(時思)라고 하는 것은 천시(天時)는 차례가 있어 변천(變遷)하고 인심(人心)은 생각이 있어서 감발(感發)하나니 성품이 착한 이치에서 나온 것이다. 사전(思傳:중용(中庸)을 말한 것)에 이르기를 「사성자(思誠者)는 인지도야(人之道也)」라고 하였는데 사람이 되는 도리는 어버이를 섬기고 제사를 받드는 것만큼 큰 것은 없는 것이다. 어버이 섬기는 효도를 다하고 원조(遠祖)를 추모하여 선조의 제사를 봉행하고 때에 따라 생각해서 그 정성 다하기를 생각하는 것이다. 오직 우리 진씨(晉氏)가 남원을 본관으로 하여 고려로부터 아조(我朝)에 이르러 위대한 업적이 많이 있어 세상에서 동방화족(東方華族)이라고 칭도하였다. 위로부터 문경공 휘 함조(含祚)와 시어공 휘 광인(光仁)과 남원군 휘 석(錫)과 예부상서공 효순(孝純)과 전공상서공 영좌(英佐)와 좌위공 휘 성용(成用)은 다 우리 현조(顯祖)이신데 누대 분묘가 다 병선(兵燹) 中에 실전하여 후손이 된 자가 능히 통한(痛恨)한 마음이 없지 못하다. 오직 진원공의 휘 여란(如蘭)과 용암공의 휘 자강(自康)이하 14·5대의 조상의 분묘가 풍악(楓岳) 남쪽 수덕봉(修德峯)의 서쪽으로 죽곡(竹谷) 율정(栗亭) 주포(周浦) 작령(鵲嶺) 대곡(大谷) 독산(犢山) 풍산(楓山) 와산(瓦山) 등지에 있어서 봄비와 가을서리가 나릴 때면 반드시 두렵고 서글픈 마음이 생기어 그 여재지성(如在之誠)이 생각남으로 산소를 살피고 제사를 받들려고 제수를 이미 갖추었으나 당구(堂構:재실을 말한 것)가 이루어지지 못해서 모든 후손이 한을 품은지가 오래되었다. 이 해 봄에 종중 의논이 합동(合同)되어 강가동(康可洞)에 있는 송정공 산소 아래에 재실 하나를 새로 창립하니 며칠 아니하여 준공되어 이 곳에 변두(邊豆:제기(祭器)를 말함)를 저장하고 이 곳에 자손이 모이어 낙성식을 하였는데 시사(時思)로 써 편액을 하였으니 대개 제통(祭統)의 「관기경이시사(觀其敬以時思)」라는 의리를 취한 것이다. 재사(齋舍) 준공하는 날 불초가 비록 글을 못하나 가히 함묵(啣偈)하지 못하겠기로 이 같은 졸렬한 문사를 기록하여 우리 후인에게 권하노니 본지(本旨) 자손이 백세를 내려가면서 선조의 이루어 놓은 정성을 생각하여 잊지 아니한즉 이것이 바로 자손의 도리가 되는 것이라고 하노라.

  정해(1947)년 3월 상순에

    불초 후손 경하(慶夏)는 삼가 찬술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