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

 

玉井碑銘 옥정비명

 

厥初生民  不由二人  先儒謂  天地之氣  生之乾父乾母  生於兩間者  擧然而此  尤襯貼克塞之氣  無此彊爾界所生  或樹下  或土穴  金櫃石쯧  己事可徵  若  晉氏之祖  生於玉井  蓋所謂  麟鳳之生  宜異於凡  其生異故  啓于後者  甚生光顯  尙書  含祚  御史  光仁  連世爲高麗名臣  南原君  錫  討平契丹  功存社稷  子孫席蔭  文行科官  世世不絶  末始不以玉井爲肇基  往在己卯  後孫  翼明  石以爲識  井堙石泐  歲久易泯  孫  台旭  玄孫  慶夏  倡宗修治  致宗議爲銘  瑩奉  舊從逐銘曰  蛟龍之跡  厥洞金岡  玉井之潔  晉祖以生  金櫃石쯧  同其神異  神異啓後  以扶麗社  水不忍廢  地不忍荒  井治石完  百世彌光

  歲在  壬子夏  四月  日    辛州  奇宇萬  謹識

有司  炳琡  必承  炳植  璣滿  璣三  在碩  鍾斗  儧旭  炳瓛  時復  炳洪  炳麟  瓘曄  秉周  祥祿

 

옥정비의 명

그 처음 백성이 출생함에 있어서 두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옛 선비가 이르기를 천지의 기운이 건부(乾父)와 곤모(坤母)에서 발생하여 이 두 사이에서 출생되는 것이 거개가 다 그런 것인데, 더욱 친첩극색(襯貼克塞)한 기운이 이 땅과 저 경계가 없이 출생하는 바로서 혹 나무 아래서 출생하기도 하고 혹은 토혈(土穴)에서 출생하기도 하며 금궤(金櫃)와 석함(石쯧)에서 나온 일은 이미 가히 증거가 되는 것이 진씨(晉氏)의 신조가 옥정(玉井)에서 나온 것과 같은 것이다. 대개 이른바 인봉(鱗鳳:기린(麒麟)과 봉황(鳳凰)으로 현철(賢哲)한 사람을 비유)의 출생은 마땅히 보통과는 다른 것이다. 그 출생함이 다르므로 그렇게 개원(開元)한 집안의 후손에게서 심한 광현(光顯)이 생기는 것이니 상서(尙書) 함조(含祚) 시어(侍御) 광인(光仁)이 대를 이어 고려의 명신(名臣)이 되었고 남원군(南原君) 석(錫)이 거란(동호족(東胡族)으로 나라를 세워 요(遼)라고 하였는데 금(金)에게 멸망되었다)을 토벌하여 사직(社稷)에 공이 있었으며, 자손들이 그 그늘에 자리잡아 문행(文行)과 과관(科官)이 대대로 끊이지 아니하였는데, 모두 옥정(玉井)으로 조기(肇基)를 하지 않음이 없었다. 지나간 기묘(1819)년에 후손 익명(翼明)이 돌에 기록을 하였는데 우물이 메이고 돌이 깎여져서 세월이 오래가면 민멸되기가 쉬우므로 손자 태욱(台旭)과 현손 경하(慶夏)가 종중을 이끌어 옥정을 수치(修治)하고, 종의(宗議)에 따라 후손 영봉(瑩奉)이 명을 만드니 옛 문헌을 좇아 명하여 가로되, 교룡(蛟龍)의 발자취(전북 남원시(全北南原市)에 있는 교룡산(蛟龍山) 아래 터를 말함) 금강동(金岡洞)에 자리한, 옥정(玉井)의 정결한 샘에서 진씨(晉氏)의 신조께서 강생하시었네, 금궤(金櫃)와 석함(石쯧)의 출생이 신기(神奇)함과 같듯이, 옥정(玉井)에서 신기하게 기원한 후손들이 고려의 사직(社稷)을 부축하였는데, 물은 차마 없앨 수 없고 땅은 차마 거칠게 할 수 없어서 옥정(玉井)을 돌로 완벽하게 수치(修治)하였으니 백세(百世)에 더욱 빛나리라.

    임자 1912年 여름 4월 일에 행주 기우만(奇宇萬)은 삼가 기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