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

 

高麗內史侍郞諡文敬南原晉公含祚神壇碑銘

             고려 내사시랑 시 문경 남원진공 함조 신단비명

 

고려(高麗) 현종(顯宗) 21年 경오(庚午) 추(秋) 7年 무인(戊寅)에 내사시랑(內史侍郞) 진공(晉公) 함조(含祚)가 졸(卒)하다.

목종(穆宗) 12年 춘(春) 정월(正月) 임신(壬申)에 왕(王)이 상정전(詳政殿)에서 관등(觀燈)할 제 대부(大府)의 유고(油庫)에서 불이 나 천추전(千秋殿)까지 연소(延燒)되었다.

王이 전우(殿宇)와 부고(府庫)가 모누 탔음을 비탄(悲嘆)하여 병(病)을 일으켜 정사(政事)를 돌보지 않자 公이 대복(大卜)으로 왕사(王師) 국사(國師) 2승(僧)과 대의(大醫) 기정업(奇貞業) 등으로 더불어 은대(銀臺)에 숙직(宿直)하여 내란(內亂)을 예방(豫防)하였다.

현종(顯宗) 11年 경신(庚申) 춘(春) 정월(正月) 계해(癸亥)에 우복야(右僕射)로 도정사(都正使)를 겸(兼)하였고 14年 계해(癸亥) 춘(春) 정월(正月) 임오(壬午)에 상서(尙書) 좌복야(左僕射)에 올랐다. 公은 특히 도참술수(圖讖術數)에 능하여 매양 국가 유사 시(國家有事時)에 자문을 받았으므로 마침내 크게 쓰이게 되었다. 이와 같은 몇 가지 기사(記事)는 고려사(高麗史) 목종(穆宗) 현종(顯宗) 2代 세가(世家) 중에 갖추어 실려 있었다.

 

公은 일찍이 호남(湖南) 남원부(南原府) 교룡산(蛟龍山) 서편 기슭 옥정(玉井)에서 발상(發祥)한 진씨(晉氏)의 시조(始祖)로 태어나 이내 관(貫)을 남원(南原)으로 하였다. 公은 위에서 열거(列擧)한 재관경력(在官經歷)이 있었는 것이니만큼 그 사공(事功)과 업적(業績)이 풍무(豐茂)하였을 것이 추측되나 세대(世代)가 요원(遼遠)하고 병란(兵亂)이 천잉(荐仍)하여 가전(家傳)이 유일(遺逸)되고 다만 고려사(高麗史) 중에 실린 이 약간의 경개(梗槩)가 남았을 뿐이다. 또 公의 유택(幽宅)마저 실전되어 향화(香火)를 받들 곳이 없어 자손(慈孫)의 경울(耿鬱)이 오래 되었다. 지난 갑인(甲寅) 1974年 3月 3日에 비로소 옥정(玉井) 손좌천(巽坐阡)에 신단(神壇)을 모으고 제전(祭奠)을 올리게 되었다. 이 신단(神壇)에 궁비(穹碑)를 세워 사적(事蹟)을 새길 제 후손(后孫) 완탁 군(完鐸君)이 80 노구(老軀)를 이끌고 북상(北上)하여 나에게 명(銘)을 청하다. 銘曰

南原雄府  蛟龍靈區  玉井之晉  源遠流悠  粤昔王麗  火烈風颼  時維侍郞  唯國是憂  神異圖讖  屢蒙咨諏  史記厥蹟  傳之千秋  丘墓失所  茫茫九幽  神壇斯屹  我銘以鎪

  갑술(甲戌) 1994年 유두절(流頭節)

    문학박사(文學博士) 진성 이가원(眞城李家源) 근찬(謹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