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

 

南原君忠敬公壇碑陰記 남원군 충경공 단비음기

 

公의 휘(諱)는 석(錫), 자(字)는 천뢰(天賚), 호(號)는 수은(睡隱), 봉호(封號)는 남원군(南原君), 시호(諡號)는 충경(忠敬), 성(姓)은 진씨(晉氏), 본관(本貫)은 남원(南原)이시다.

시조(始祖) 함조(含祚)께서는 고려(高麗) 현종조(顯宗朝)에서 상서(尙書) 좌우복야(左右僕射)를 역임하시고 선친(先親) 광인(光仁)께서는 명종조(明宗朝)에서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로 나라의 기강(紀綱)을 바로잡는데 앞장서신 원훈(元勳)이시다.

 

公께서는 지략(智略)이 남달리 뛰어나고 덕망(德望)이 출중(出衆)하시었으나 은덕(隱德) 불사(不仕)하시었는데 고려(高麗) 고종(高宗)이 이 사실(事實)을 알고 원수(元帥) 김양경(金良鏡)을 시켜 출사(出仕)할 것을 누차 권하였으나 公은 더욱 겸양(謙讓)하며 굳이 사양하시고 있을 때 1218 고종(高宗) 5年 거란(契丹)의 대군(大軍)이 침공(侵攻)해 오자 고종(高宗)이 다시 사공(司空) 조충(趙冲)을 시켜서 이르기를 「경(卿)의 가문(家門)은 대대(代代) 충정(忠貞)으로 국난(國難)을 구제(救濟)하여 왔는데 이제 거란병(契丹兵)이 대거(大擧) 침입해 와서 국운(國運)의 위박(危迫)함이 조석(朝夕)에 달려 있거늘 경(卿)이 만약 허유(許由)가 기산(箕山)에서 내려오지 않는 것처럼 끝내 출사(出師)를 사양한다면 과인(寡人)도 한(漢)나라 소열(昭烈)이 제갈량(諸葛亮)을 얻기 위해 삼고초려(三顧草廬)한 것처럼 해서라도 기어이 경(卿)을 맞이하겠노라」 하자 더 이상 사양을 못하고 즉시 일어나 거란군(契丹軍)을 대첩(大捷)하고 개선하시니 고종(高宗)이 그 날로 公을 남원군(南原君)에 봉군(封君)하였다.

 

정사(政事)를 베푸심에 선정(善政)으로 백성(百姓)의 존앙(尊仰)을 받으시고 틈틈이 제자(弟子)들에게 학문(學問)도 강(講)하시다가 서거(逝去)하시니 시호(謚號)를 충경(忠敬)이라 하였다.

나라를 지켜 주신 공덕(功德)과 선정(善政)이 모든 생민(生民)에게 미쳐 천고(千古)의 충훈(忠勳)과 덕혜(德惠)가 오랜 세대(世代)까지 소문나 있으며 1801 순조(純祖) 1年에 사림(士林)들이 남원군 주생면 이언동(南原郡周生面伊彦洞)의 이호서원(伊湖書院)에 公과 김양경(金良鏡) 2현(賢)을 배향(配享)하였다.

삼가 용성지(龍城誌)와 김모재집(金慕齋集)을 증거로 이와 같이 약기(略記)하며 유택(幽宅)을 실전(失傳)하여 향화(香火)를 받들지 못하다가 갑인(甲寅) 1974年 음3月 3日 선친(先親)의 단소(壇所) 서편 손좌원(巽坐原)에 단(壇)을 쌓아 추원감모(追遠感慕)하니 公의 훈업(勳業)이 더욱 현창(顯彰)하여져서 후세(後世)의 가르침이 될 것이다.

  갑술(甲戌) 1994年 3月 1日

    후손(後孫) 병두(炳斗) 근찬(謹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