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

 

南原晉氏六位壇碑文 남원진씨 6위 단비문

 

1世  효순(孝純)  예부상서(禮部尙書)

2世  광유(光裕)  판도판서(判圖判書)

3世  충(冲)      전중급사동정(殿中給事同正)

4世  성(誠)      태자정윤(太子正允) 정당문학(政堂文學)

5世  홍부(洪富)  병부상서(兵部尙書)

6世  영좌(英佐)  봉익대부(奉翊大夫) 전공상서(典工尙書)

 

남원진씨(南原晉氏) 시조(始祖)는 함조(含祚)요 고려(高麗) 현종조(顯宗朝)에 호부상서(戶部尙書) 및 도정상서(都正尙書)와 좌우복야(左右僕射)에 이르고 公의 후손(後孫) 광인(光仁)은 고려(高麗) 명종조(明宗朝)에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를 지냈으며 석(錫)은 고려(高麗) 고종(高宗) 때 김양경(金良鏡)과 더불어 거란(契丹)의 침입(侵入)을 물리친데 크게 공(功)을 세워 남원군(南原君)을 봉(封) 받고 후세(後世)에 이르면서 충정(忠貞)과 과관(科官)이 연면(連綿)하였다.

그러나 고려 말(高麗末) 혁명(革命)을 반대(反對)하고 충절(忠節)을 지키다가 가문(家門)이 몰락(沒落)되는 한편 유구(悠久)한 세월(歲月)이 흐르면서 전란(戰亂)과 천재지변(天災地變) 等으로 인(因)하여 선조(先祖)의 묘(墓)를 실전(失傳)하고 이를 비통(悲痛)하던 후손(後孫)들이 일찍이 남원군 주생면 지당리 강가동(南原郡周生面池塘里康可洞)에 효순(孝純) 광유(光裕) 충(冲) 성(誠) 홍부(洪富) 영좌(英佐) 6位의 사단(祠壇)을 모시고 봉사(奉祀)하여 오다가 1981年 종의(宗議)에 따라 남원진씨(南原晉氏)의 발원지(發源地)요 시조공(始祖公)의 단소(壇所)가 계신 이 곳 대산면 금강동(大山面金岡洞)으로 이안(移安)함으로써 시조공(始祖公) 이하(以下) 9位의 단소(壇所)를 1강(岡)에 모시게 된 것이다.

 

이 사실(史實)을 후손(後孫)에게 알리고자 이 비(碑)를 세우면서 후손(後孫) 희욱(羲旭)이 불녕(不佞)을 찾아 청문(請文)하기에 서상(敍上) 약술(略述)하고 이어 명(銘)하되 교룡산(蛟龍山) 정기(精氣) 충절(忠節)을 낳고 옥정수(玉井水) 흘러 강(江)을 이루듯이 진씨세계(晉氏世系)는 영원무궁(永遠無窮) 번영(繁榮)하고 위대(偉大)한 인재(人材)들이 샘물처럼 속출(續出)하여 길이 빛내리.

  계해(癸亥) 1983年 3月 日

    전 성균관전의(前成均館典儀) 완산인(完山人) 이만기(李萬器) 근찬(謹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