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太初)의 창시(創始) 때 진성(晉姓)의 발상지(發祥地)로 점지되어 억겁(億劫)의 신비리(神秘裡)에 상서(祥瑞)로움이 조응(照應)해 오다가 9세기(世紀) 말엽에 이르러 옥동자(玉童子)가 강탄(降誕)하니 이 샘을 일컬어 옥정(玉井)이라 하고 옥정(玉井)은 우리 성씨(姓氏)의 기원지(起原地)가 되었으며 옥동(玉童)은 우리 진씨(晉氏)의 신조(神祖)이시다.
그때 마침 샘가에 강림(降臨)한 옥녀(玉女)를 맞아 토착(土着)하여 아들을 낳으시니 시조(始祖)의 함조공(含祚公)이시다
그로부터 천년(千年) 만에 이 성(聖)스러운 옥정 영역(玉井靈域)에 재전(齋殿)을 세우고 옥정재(玉井齋)라 현판(懸板)하니 1813 계유년(癸酉年) 옥정(玉井)의 수치(修治)와 옥정원(玉井原)에 1974年 시조공(始祖公) 이하(以下) 3位의 설단(設壇) 1983年 1世 효순공(孝純公) 이하(以下) 6位의 이단(移壇)에 이어 천년미증유(千年未曾有)의 대역사(大役事)가 준공(竣工)되고 수백 년(數百年) 동안 갈망(渴望)하던 숙원(宿願)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1989年 1月 총회(總會)에서 결의(決議)하고 3年間에 걸친 추진임원(推進任員)들의 합심협력(合心協力)과 아낌없이 참여(參與)하고 찬조(贊助)해준 종친(宗親)들의 지성(至誠)으로 이룩된 이 재전(齋殿)이 길이 보존(保存)되어 후손(後孫)들의 숭조사업(崇祖事業)에 본(本)이 되기를 바라면서 이 비(碑)를 세우다.
1992 임신년(壬申年) 4月 5日 陰3月 3日 건립(建立)
종친회장(宗親會長) 철하(哲夏) 근수대표(謹豎代表)
후손(後孫) 병두(炳斗) 근찬(謹撰)
후손(後孫) 용탁(龍鐸) 근서(謹書)
(뒷면 記)
옥정재 건축기(玉井齋建築記)
·소재지(所在地):남원군 대산면 금강동(南原郡大山面金岡洞) 옥정역(玉井域) 서남(西南)쪽 손좌(巽坐)
·건 평(建坪):15평(坪) 목조개와(木造改瓦)집 1동(棟) 4간(間) 앞퇴
·건축비(建築費):3千萬원
·준공일(竣工日):1991 신미년(辛未年) 10月 31日
·도목수(都木手):김효권(金孝權)
·헌성금(獻誠金):종파별(宗派别)
판서공파(判書公派) 5百萬원 첨정공파(僉正公派) 2百萬원
감무공파(監務公派) 5百萬원 학사공파(學士公派) 5百萬원
·개인별 방명(個人别芳名)
판서공파(判書公派) 1百萬원 오석(仵錫)
50萬원 강현(康鉉) 준호(俊鎬) 대현(大鉉) 상호(相鎬)
30萬원 재식(在拭) 수동(壽同) 유현(渪鉉) 영호(榮鎬) 호영(浩英)
홍갑(洪鉀) 만(卍) 홍삼(洪三) 홍재(洪宰) 효근(曉槿)
첨정공파(僉正公派) 50萬원 완탁(完鐸) 용택(龍澤) 영숙(永淑)
30萬원 현탁(鉉鐸) 영섭(永燮) 영원(永元)
영희(永喜) 영관(永瓘) 영윤(永允)
감무공파(監務公派) 1百萬원 철하(哲夏) 규룡(奎龍)
50萬원 병량(炳良) 병기(炳基) 규철(奎喆) 규태(奎泰) 규상(奎相)
규홍(奎烘) 규삼(奎森) 규선(奎先) 천탁(天鐸) 일탁(日鐸) 승탁(承鐸)
30萬원 규동(奎東) 규형(奎炯) 용탁(龍鐸) 현탁(鉉鐸) 경수(敬壽)
학사공파(學士公派) 1百萬원 양욱(良旭) 규선(奎瑄)
50萬원 대욱(大旭) 태원(泰杬) 명길(明吉)
40萬원 공욱(公旭)
30萬원 해욱(海旭) 병두(炳斗) 병순(炳舜) 병길(炳吉) 성태(成泰)
병서(炳瑞) 병재(炳在) 병철(炳喆) 원(圓) 규표(奎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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