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

 

勇齋公行狀 용재공 행장

 

公諱后昌字義遠號勇齋姓晉氏系出南原戶部尙書謚文敬公諱含祚是爲上祖南原君諱錫其中祖也三重大匡門下評理諱成乙縣監諱淑文正郞諱嵩進士諱宗沃其高曾祖禰也妣黃驪李氏公以  世宗丁巳四月十九日生天姿英特氣宇軒昂年甫六七倜儻多不覊不喜讀書欲學萬人敵及長善騎射好馳馬以故人名其所居里曰喝馳云天啓壬辰登虎榜授宣略將軍龍驤衛副司果轉除訓鍊院主簿時昇平日久國家無事朝廷之人皆以文事驟進而赳赳于城之才反睥睨下位公鬱不能得志時或撫劎長歌曰大丈夫生於世無立功虛老則不如無生矣其爲國願忠之意蓋素所蓄積也平生不拘於小節至於臨大事處大變則有截然難犯之勢急人之難如恐不及見事生風勇往直前不少回避見人之阿諛奸回者疾之如讎必面折人皆畏憚無敢飾非矣戊寅四月七日遭艱喪葬盡禮服闋不復仕進每誦陶靖節歸去來辭一篇以寓志尤喜文天祥陸秀夫爲人寫奉二公眞影於松文堂朝夕瞻拜其尙節之意可見也其所著有武備全書一部爲陰雨之備而不能究用惜哉甲子九月三日以疾終于寢享年六十七葬于先壠下乙坐之原配淑夫人原州李氏監察再春之女墓同原異壙男胤賢孫聖重曾玄不盡錄於乎公禀傑特之氣負英略之才假使適其用也可以當南城之守矣可以鎻杜門之鑰矣而命與仇謀時又不利終不得展其所蘊識者之恨爲何如哉日公之後孫叅奉鍾成袖遺事遠訪請余以狀行之文以余後生蔑學何敢當伊昔欽仰之餘因是役得以附名則幸矣遂按據來狀略加檃括以俟秉管家之裁擇云爾謹狀

  癸酉小春節上澣    嘉善大夫宗正院卿全州李明翔謹狀

 

용재공의 행장

공의 휘는 후창(后昌)이요 자는 의원(義遠)이며 호는 용재(勇齋)이니 성은 진씨(晉氏)로 세계는 남원에서 나왔다. 호부상서로 호 문경공 휘 함조(含祚)는 이 분이 상조(上祖)가 되고 남원군 휘 석(錫)은 그의 중조(中祖)이다. 삼중대광 문하평리 휘 성을(成乙)과 현감 휘 숙(淑)과 문과 정랑 휘 숭(嵩)과 진사 휘 종옥(宗沃)은 그의 고조 증조 조부 아버님이며 어머님은 황려이씨(黃驪李氏)이다. 공이 세종(世宗) 정사년 4월 19일에 출생하니 천자(天姿)가 영특하고 기우(氣宇)가 헌앙(軒昂:헌출한 모양)하였고 나이 겨우 6~7세에 여러 사람 중에서 뛰어나 구애를 받지 않는 것이 많았으며 글 읽기를 좋아하지 아니하고 만인적(萬人敵:만인을 대적할 법이란 말하니 병략(兵略)과 진법(陣法)을 말한 것)을 배우고자 하였다. 장성해서는 말 타고 활쏘기를 잘하고 말달리기를 좋아하였다. 그러하므로 해서 사람들이 그가 사는 마을을 갈치(喝馳)라고 이름하였다고 한다. 천계(天啓) 임진년에 호방(虎榜―무과)에 올라 선약장군 용양위 부사과에 제수되었고 훈련원 주부로 전직되었다. 이 때 승평(昇平)한 날이 오래되어 국가가 무사하니 조정사람이 다 문사(文事)에 추진(驟進)하여 규규(赳赳:훌륭한 모양)한 간성지재(干城之材:국가를 위하는 방패와 성같은 재격)가 하위(下位)에서 눈치만 보게 되었다. 공이 능히 뜻을 얻지 못하는 것을 울분하게 여기어 때로는 혹 칼을 어루만져 길이 노래하여 가로대 「대장부 세상에 나서 공명을 세운 것 없이 헛되게 늙는다면 차라리 삶이 없는 것만 같지 못하다.」라고 하니 그 나라를 위하여 충성하기를 원하는 뜻을 대개 본래부터 축적한 것이다. 평생 소절(小節)에 구애하지 아니하고 대사에 임하여 대변(大變)을 처리하는데 이르러서는 절연(截然)히 범하기 어려운 기세가 있었으며 사람의 어려움을 구함에 있어서는 미처 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고 일을 보면 풍치가 생기어 용왕직전(勇往直前)하여 조금도 회피하지 아니하였으며 사람이 아첨하고 간교하게 돌리는 자를 보면 미워하기를 원수같이 하여 반드시 면대하여 꺾어 버리니 사람들이 다 두려워하고 꺼리어 감히 그른 일을 꾸미지 못하였다. 무인년 4월 7일에 간상(艱喪)을 당하여 장례 모시는데 예를 다하였고 상복을 벗은 뒤에는 다시 벼슬에 나가지 아니하고 매양 도정절(陶靖節:도연명의 시호)의 귀거래사(歸去求辭)를 외어 뜻을 보이었다. 문천상과 육수부(文天祥과 陵秀夫:두 사람은 다 송(宋)나라의 충신(忠臣)이다)의 사람됨을 더욱 좋아하여 2公의 진령(眞影)을 송문당(松文堂)에 받들어 모시고 조석으로 첨배하였으니 그의 절의를 숭상하는 뜻을 가히 알겠다. 그가 저술한 무비전서(武備全書) 일부(一部)가 있어서 음우(陰雨:비상(非常) 시기를 비유한 말)를 위하여 준비된 것인데 능히 연구해서 사용하지 못하였으니 가석한 일이다. 갑자년 9월 3일에 병환으로 정침(正寢)에서 돌아가니 향년이 67이다. 선산 아래 을좌(乙坐)로 된 언덕에 장례 모시었다. 배위 숙부인 원주이씨는 감찰 재춘(再春)의 따님이니 묘는 공의 묘와 같은 언덕에 광(壙)이 다르다. 아들은 윤현(胤賢)이고 손자는 성중(聖重)이니 증손과 현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아니한다.

아! 공이 걸특(傑特)한 기질을 타고나서 영략지재(英略之才)를 품었으니 가사(假使) 임용(任用)을 하였다면 남성(南城)의 수호도 가히 담당할 것이고 두문(杜門)의 열쇠도 가히 잠글 것인데 명도(命道)가 원수와 더불어 모의하고 시운(時運) 또한 이롭지 못해서 마침내 그의 온축(蘊蓄)한 재략을 전용(展用)하지 못하였으니 아는 사람들의 한이 어떠하겠는가. 어느 날 공의 후손 참봉 종성(鍾成)이 공의 유사(遺事)를 가지고 멀리 찾아와서 나에게 장행지문(狀行之文)을 청하였다. 나같은 후생의 멸학(蔑學)으로 어찌 감당하리요만은 옛부터 공을 흠앙하여 오던 나머지 이 역사(役事)로 인하여 이름을 부치게 되는 것은 다행한 것이므로 드디어 가지고 온 장문에 의거하여 간략하게 은괄(檃栝:바로 잡는 것)을 더하여 붓을 잡아 입언(立言)하는 분의 재택(栽擇)을 기다리면서 삼가 장(狀)하노라.

  계유(1933)년 10월 상순에

    가선대부 종정원경 전주 이명상(李明翔)은 삼가 장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