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

 

松隱公行狀 송은공 행장

 

於戲公諱國明字善文姓晉氏籍南原鼻祖諱含祚麗顯宗朝官至戶部尙書僕射謚文敬有諱光仁  明宗朝殿中侍御史生諱錫  高宗朝討捷契丹大有功勳封南原君事見金公慕齋集掌令蔚山金壽祖追述行狀世有官蔭有諱于蘭前朝學士革命之後遯跡頭流山中累徵不就生諱虎老克遵先節不求聞達名其洞曰杜門號其堂曰望松傳至諱貞  通政大夫戶曹叅議公之九世祖也高祖諱邦漢護軍曾祖諱順應文行特著祖諱廷表以孝行載三綱錄考諱允復克勤克儉言語溫淳有古家典刑妣慶州金氏鎭河女生有婦德閨門雍睦生二男長曰亮明公其季也生  憲宗甲辰六月十三日天性淳篤自齠齡能知事親之方年甫九歲叔父博士公使門子姪咏松叶韻公輒對一絶曰秦封大夫幾百年猶自蒼蒼澗水邊狂風一陣且莫吹恐或枝頭警鶴眠博士公稱之因錫號松隱及長隱居晦跡餘力學文孝悌爲先務詞章屬餘事敎授鄉閭薰於其德而善養者多矣先遭皇考憂初終凡節極盡禮貌養偏母以孝矣未幾伯氏早卒母夫人喪明而不見天地日月公每侍飯供饌以手指告曰此某物此某物知是者三十餘年未嘗懈弛母夫人壽康以天年終公不撤哭泣哀毁逾節吊者大悅孰不欽嘆哉  光武癸卯元月十七日卒禮葬于望墻下先塋東麓子坐原前配平澤林氏柏淑女早卒后配全州李氏太善女將有淑娩之德生五男長璣章出系伯父次璣容璣鍾璣完璣圭以下多不盡錄嗚呼公居在比隣與吾從遊者殆將四十餘載情誼甚篤一日其族孫勉旭甫公之事實謂佘詳知要以狀德之文余不以文指數者何敢發揮擧實撰出以俟後君子裁擇馬

  歲在乙巳四月日    順興安宗純謹狀

 

송은공의 행장

아! 공의 휘는 국명(國明)이요 자는 선문(善文)이며 성은 진씨니 남원을 본관으로 하였다. 비조 휘 함조(含祚)는 고려 현종조(顯宗朝)에서 관직이 호부상서 복야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경공이다. 휘 광인(光仁)이 있어 명종조(明宗朝)에서 전중시어사를 하였고 이 분이 낳으신 휘 석(錫)은 고종조(高宗朝)에서 거란(契丹)을 토벌해서 승리하여 크게 공훈이 있어 남원군을 봉하였으니 이 사적이 김공 모재집(慕齋集)과 장령 울산 김수조(金壽祖)가 추술(追述)한 행장에 보이었다. 대대로 관음(官蔭)이 있었고 휘 우란(于蘭)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전조(前朝:고려조를 말한 것)의 학사로 혁명(革命) 후에 두류산 속에 자취를 감추고 여러 번 임금이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이 분이 낳은 휘 호로(虎老)는 능히 선조의 절의를 준행하여 문달(聞達)을 구하지 않고 그 동리를 두문(杜門)이라 이름하고 그 당(堂)은 망송(望松)이라 호를 하였다. 전해서 휘 정(貞)에 이르러 관직이 통정대부 호조참의니 공의 九세조이다. 고조의 휘는 방한(邦漢)이니 호군이요 증조의 휘는 순응(順應)이니 문행(文行)이 특별히 드러났고 조의 휘는 정표(廷表)니 효행이 상감록(三綱錄)에 실렸으며 고의 휘는 윤복(允復)이니 행실이 근검하고 언어가 온순하여 고가(古家)의 전형(典刑)이 있었고 비(妣)는 경주김씨니 진하(鎭河)의 따님인데 나면서 부덕이 있어 규문(閨門)이 화목하였다. 2남을 낳았으니 장남은 양명(亮明)이라 하고 공은 그 다음이다. 헌종(憲宗) 갑진년 6월 13일에 출생하였으니 천성이 순수하고 독실하여 7, 8세로부터 능히 어버이 섬기는 방법을 알았다. 나이 겨우 9歲에 숙부 박사공이 문중 자질(子姪)로 하여금 그 소나무에 대한 시를 지어 읊게 하니 공이 문득 일절시(一絶詩)로 대답하여 가로되 「진나라가 대부를 봉한 지 몇 백 년이나 되었는가[秦封大夫幾百年] 오히려 스스로 푸르고 푸르러 시냇물 가에 서있네[猶自蒼蒼澗水邊] 일진광풍(一陣狂風)은 또 다시 붙지 말라[狂風一陣且莫吹] 혹 가지의 학의 꿈을 깨울까 두려워하네[恐或枝頭警鶴眠]」라고 하니 박사공이 칭찬하고서 인해 호를 송은(松隱)이라고 하여 주었다. 장성해서는 숨어 살면서 자취를 감추고 여력(餘力)으로 학문을 하는데 효제(孝悌)를 급선무로 하고 사장(詞章)은 여사(餘事)로 부치어 향려(鄉閭)를 가르쳐 주니 그 덕에 훈도(薰陶)되어 선양(善養)한 자가 많았다. 먼저 아버님 상사를 당하여 초종 범절에 예절을 극진히 하고 혼자 계신 어머님을 효도로 봉양하였다. 얼마 되지 아니해서 백씨가 조졸(早卒)하니 모부인이 상명(喪明:자식이 죽으면 상명지통(喪明之痛)이라고 하는데 公의 모부인(母夫人) 역시 실지 상명이 되었다)이 되어 천지일월(天地日月)을 보지 못하므로 공이 매양 모시고 밥과 찬을 받드는데 손으로 가리켜 가로되 이것은 무슨 물건이고 저것은 무슨 물건이라 고 하였다. 이같이 한 지 30여 년에 일찍이 해이(懈弛)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부인이 건강하고 수하시어 천년(天年)으로 세상을 마치시니 공이 곡읍을 거두지 아니하고 애훼(哀毁)함이 예절에 지나쳐 조문하는 자가 크게 기뻐하였으니 그 누가 흠탄하지 않았겠는가. 광무 계묘년 정월 17일에 졸하여 망장(望墻) 아래 있는 선영(先塋) 동쪽 기슭의 자좌원에 장례 모시었다. 전 배위는 평택임씨로 백숙(柏淑)의 따님이니 조졸하였고 후배(後配) 전주이씨는 태선(太善)의 따님이니 정숙하고 완만(婉娩)한 덕이 있었다. 5남을 낳았으니 장남 기장(璣章)은 백부에게 출제(出系)하였고 다음은 기용(璣容) 기종(璣鍾) 기완(璣完) 기규(璣圭)인데 이하는 많아서 다 기록하지 못만다.

아! 공의 거주지가 이웃에 있어서 나와 더불어 종유(從遊)한 지가 자못 40여 년이 되어 정의가 심히 두터웠다. 하루는 그 족손 면욱(勉旭)씨가 공의 사실은 내가 자상히 안다고 하여 장덕지문(狀德之文)을 요구하였다. 나는 글을 한다는 수자에 들지 못하는 자이니 어찌 감히 발휘한다고 하겠는가. 사실을 들어 찬술하여 후일 군자(君子)의 재택을 기다리는도다.

  세차 을사(1905)년 4월 일에    순흥 안종순(安宗純)은 상가 장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