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

 

松軒公墓碣銘(幷序) 송헌공 묘갈명(병서)

 

丙申春余過雲水縣回文山下訪見德村趙君顯洙甫方刊晉氏譜爲其閱人譜系仍留焉越數日耕隱晉公叅於讎任自芳洞來舊衣冠而表儀端寔我先師嘗序晉氏譜蔚然爲東邦華族德行冠世之閥俟百世而不惑也與晉公從遊有日其行也審其言也信一日顧佘曰吾祖之圽于今百有餘載墓前之翁仲己樹而未備者表阡文也吾子第爲我述之佘謝辭不敢曰諸長老作者自在其人奚以佘不文爲請猶不置乃爲之言嗚呼人家祖先或有膚行毫節爲其後仍者闡揚之猶不暇况有潛德懿行爲後孫之模範者乎當特書而傳諸後孝子慈孫繼述之道有所不己此晉氏松軒公之實行而耕隱公之繼述也夫公諱德采字明玉松軒其號也晉氏籍南原高麗  顯宗朝戶部尙書文敬公諱含祚其鼻祖也世聯圭組高祖諱得省通訓大夫軍資監正曾祖諱三國通訓大夫工曹叅議祖諱元基嘉善大夫漢城府左尹考諱萬赫通政大夫司僕寺正妣淑人濟州梁氏父道亨  純祖壬午生公于芳洞村第公生而穎悟年未弱冠起居動止有長者氣像性嗜學伊吾不絶十數年文華大就乃欲爲悅親志尤篤於公車而出入京洛殆二十餘禩時運不齊命途多舛竟未得志而歸彼哉蓮花落落一朶欲折而未攀靑雲難力致其非斯歟雖然浪費了半生光陰榮親之計都歸乎烏有則渡灞飲恨雖尾閭猶不能盡洩眞古所謂天地之大猶有所憾者也嗚呼曷歸於是乎決然捨歸鄉山閉戶力學嚴立課程四方學者多從焉敎亦多術因其性而導之隨其材而充之或不罰而化之蓋以身敎之之效也樂乎道者如是而以不得悅乎親無有爲一生之恨或弛豈非孝之一字爲頭腦耶人能孝於親如是至也君臣也夫婦也昆弟也朋友也亦何往而不可哉  憲宗乙未以學行薦  贈通政大夫配淑人草溪崔氏福業女有壼儀生二男長桐直次桐若孫洪福洪規長男出洪大洪模次男出若曾若玄不盡錄公享年九十三而卒臨命顧其子孫曰平生所志竟未得遂恨莫甚焉爾曺克勤克儉勿墜家聲翛然而逝葬于芳洞後麓草長洞壬坐原配淑人墓在家墓洞子坐相距數武許於乎公生于斯世忍性力行乃詩禮家之擩染逾耄近百其仁者壽之徵驗厚乎身而嗇乎運者抑何以哉其所蘊乎中者縱未能盡布於當日而貽嘉猷於後世者亦湥矣慕其德而高其風者誦之不己乎今日豈不韙且大歟不佞於其玄孫也素無雅分觀其言行焉能捜哉故信其言姑擧梗槩如上以俟夫後君子之叅酌焉系之銘曰以松名軒其志高潔以孝爲本悅親未悅蓮花一朶欲攀未折幡然歸鄉閉門歛跡受學者多立心堅確臨命一言遺芳百曆於斯焉卜於斯焉藏鶉水之北薇山之陽惟公之德山水俱長馬髯重新過者必式我作此銘恐惶無極槩公行誼盍視斯刻

  柔兆涒灘首夏下澣   南原楊秉晦謹撰

 

송헌공의 묘갈명(병서)

병신년 봄에 내가 운수현(雲水縣) 회문산 아래를 지내다가 덕촌(德村)에 사는 조군 현수(趙君顯洙)를 찾아보았다. 바야흐로 진씨보(晉氏譜)를 간행하는데 사람의 보계(譜系)를 열람하기 위하여 인해 머물러 있었는데 수일을 지나 경은(耕隱) 진공이 교정하는 책임을 맡고 방동(芳洞)으로부터 왔는데 옛날 우리 의관(衣冠)으로 의표(儀表)가 단정하였다. 우리 선사(先師:죽은 스승을 선사(先師)라 함)께서 일찍이 진씨의 보서(譜序)를 하시었는데 「울연(蔚然)히 동방화족(東方華族)이 되어 덕행이 세상에 으뜸가는 가벌로 백세를 기다려도 의혹할 것이 없다.」고 하였다. 진공과 더불어 종유(從遊)한지 며칠 되는데 그 행동은 바르고 그 말씀은 믿을 만하였다. 하루는 나에게 말하기를 「우리 할아버님이 돌아가신지 지금 백여 년이 되었는데 묘전에 상석과 망주석은 이미 세웠으나 갖추지 못한 것은 표천문(表阡文)이다. 자네가 나를 위하여 찬술하라.」 하거늘 내가 불감(不敢)하다고 사양하여 가로대 모든 장로(長老) 중에 지으실 사람이 스스로 있나니 어찌 나 같은 글을 못하는 자에게 청하는가 해도 오히려 그냥 두지 아니하므로 이에 말을 하게 되었다.

아! 사람의 집에 조선(祖先)이 혹 부행호절(膚行毫節:피부와 같은 것으로 나타난 행동과 터럭과 같은 작은 절의)이 있더라도 그 후손이 된 자 오히려 천양하는데 겨를이 없겠거늘 하물며 숨은 덕과 아름다운 행실이 있어 후손의 모범이 되는 것이겠는가. 마땅히 특별히 써서 후세에 전하여 효자자손(孝子慈孫)의 계술하는 길을 열지 아니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진씨 송헌공의 실행을 경은공(耕隱公)이 계술한 것이다. 무릇 공의 휘는 덕채(德采)요 자는 명옥(明玉)이며 송헌(松軒)은 그의 호이다. 진씨(晉氏)가 남원에 관적(貫籍)을 두었으니 고려 현종조 때 호부상서 문경공 휘 함조(含祚)는 그 비조(鼻祖)이니 대대로 관직이 연속되었다. 고조의 휘는 득성(得省)이니 통훈대부 군자감정이요 증조의 휘는 삼국(三國)이니 통훈대부 공조참의며 조부의 휘는 원기(元基)니 가선대부 한성부 좌윤이요 아버님의 휘는 만혁(萬赫)이니 통정대부 사복시정이며 어머님은 숙인 제주 양씨(梁氏)니 친정아버님은 도형(道亨)이다. 순조(純祖) 임오년에 방동촌제(芳洞村第)에서 공을 낳았다. 공이 출생하면서 영리하여 나이가 약관(弱冠:20을 약관(弱冠)이라 함)도 되지 아니하여 기거동지(起居動止)가 장자(長者)의 기상이 있었다. 성품이 학문을 좋아하여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아니한지 10수 년에 문화(文華)가 크게 성취되었다. 이에 어버이의 뜻을 기쁘게 하여 드리기 위하여 공거문(公車文)을 더욱 독실히 하여 경락(京洛)에 출입한지 자못 20여 년이 되었다. 시운이 따르지 아니하고 명도(命途)가 어그러짐이 많아 마침내 뜻을 얻지 못하고 돌아오니 「저 낙낙(落落)한 연꽃 한 송이를 꺾고자 하나 손이 닿지 아니하는구나 청운(靑雲:벼슬길)을 힘으로 이르기가 어렵다.」는 것이 이것이 아니겠는가. 비록 그러하나 반평생의 광음을 낭비(浪費)하고 어버이를 영화롭게 해드리려는 계획이 오유(烏有)로 돌아갔은즉 한(恨)을 머금고 패강(灞江)을 건너니 비록 미여(尾閭:대해(大海) 깊은 곳에 있어 그칠 사이 없이 물이 샌다는 곳을 말함)라도 오히려 능히 다 쏟지 못할 것이다. 참으로 옛사람이 이른바 천지의 큼으로도 오히려 한 되는 바가 있다는 것이다. 아!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 결연히 놓고 향산(鄉山)으로 돌아와 문을 닫고 학문에 힘을 써서 과정(課程)을 엄하게 세우니 4방의 학자가 많이 좇아왔고 교수도 역시 술법(術法)이 많아 그 성품으로 인하여 인도하고 그 재목에 따라 보충을 하여 벌을 주지 아니해도 변화하니 대개 몸으로써 실행하여 가르친 효과이다. 도를 즐거워한 것 이 이 같음에도 어버이를 기쁘게 하여드리지 못한 것으로 일생의 풀지 못할 한이 되어 있으니 어찌 효(孝)의 일자(一字)로 두뇌(頭腦)를 한 것이 아니겠는가. 사람으로서 능히 부모에게 효하기를 이같이 지극히 하였으니 군신과 부부와 형제와 붕우 등등 그 어디인들 옳지 아니하겠는가. 현종 을미년에 학행으로 추천되어 통정대부에 증직되었다. 배위 숙인 초계 최씨(崔氏)는 복업(福業)의 따님이니 곤의(壼儀:부덕이란 것)가 있었다. 2男을 낳았으니 장남은 동직(桐直)이요 차남은 동약(桐若)이며 손자 홍복(洪福)과 홍규(洪規)는 장남이 낳았고 홍대(洪大)와 홍모(洪模)는 차남이 낳았으며 증손과 형손은 다 기록하지 아니한다. 공이 향년 93세에 졸하였는데 임종할 때 그 자손에게 말씀하기를 평생에 뜻한 바를 마침내 이루지 못하였으니 한이 막심하다 너희들은 능히 근검(勤儉)하여 집안의 명성을 추락시키지 말라 하고 홀연히 세상을 뜨시었다. 방동(芳洞) 후록 초장동(草長洞) 임좌원에 장례 모시었고 배위 숙인의 묘소는 가기동(家基洞) 자좌에 있어서 서로 거리가 수무(數武) 남짓하다. 아! 공이 이 세상에 출생하여 성질을 참고 힘써 행한 것은 곧 시례가(詩禮家)에서 나렴된 것이요 90을 넘어 百에 가까운 것은 인자(仁者)가 수를 한다는 증험이니 하늘이 몸은 후하게 해주고 운(運)에는 인색하였으니 이 또한 어찌된 것인가. 그 흉중에 쌓은 것을 비록 당일에 능히 다 펴지 못하였으나 후세에 가유(嘉猷)를 끼쳐 준 것이 역시 깊어서 그 덕을 사모하고 그 풍도를 높이 보는 자 금일에도 칭송하여 마지 아니하니 어찌 위대하지 아니하랴. 내가 그 현손에게 원래 아분(雅分:친한 정리)이 없었으나 그 언행(言行)을 보니 어찌 능히 숨기겠는가. 그러므로 그 말을 믿고 위(上)와 같미 경개(梗槩)를 거론하여 후일 군자의 참작을 기다리면서 계속하여 명하여 가로되

송(松)으로써 헌(軒)을 이름하니 그 뜻이 고결(高潔)하시었고

효(孝)로써 근본을 하여 어버이 기쁘게 하려다가 못하였네

한 송이 연화(蓮花)를 어루만지고자 하였으나 꺾지 못했구나

번연(幡然)히 고향으로 돌아와 문을 닫고 자취를 감추도다.

수학(受學)하는 자가 많이 이르니 입심(立心)이 견고하고 화실하였네.

운명(殞命)에 임하며 한 마디 말씀은 백세(百世)에 아름다움 전했지

여기에 묘지를 구하고 여기에 장례를 모시었으니

순수(鶉水)의 북쪽이고 미산(微山)의 남쪽이 되어 있구나.

오즉 공의 아름다운 덕은 청산록수와 더불어 장구(長久)하게 전해가리니

말갈기 같은 봉분이 거듭 새로워졌으니 지나는 자는 반드시 공경하리로세

내가 이 명을 지음에 있어서 돌이켜 보건대 두려운 마음 끝이 없구나

공의 행의(行誼)를 알고자 한다면 어찌 이 현각(顯刻)을 보지 아니하리

 

  병신(1956)년 4월 하순에

    남원 양병회(梁秉晦)는 삼가 찬술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