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

 

博士公墓碣銘 박사공 묘갈명

 

公以成均博士侍講尙書至惟王不邇聲色拜手稽首曰此聖主所當軆念蓋時方幼冲易爲聲免所移而遽以是進戒焉嗚呼歷世人主亡身喪邦未有不由於此公之一言誠眞切藥石使公久於朝當啓沃弘多而惜乎其不壽也又嘗與同僚言曰程夫子云一命之士苟存心於愛物於人必有所濟吾輩豈以職小而惑忽也夫人不言言必有中以是而想像焉則公蓋正身而事君修身而信友者矣公諱昌復字明瑞晉氏南原人高麗僕射含祚其始祖侍御史光仁生南原君錫討捷契丹爲麗伐元勳世珪組學士于蘭見麗運將訖遯跡頭流山中我  朝徵命屢至而不能起生望松堂虎老克守父志世稱杜門洞卽其居也世有官蔭曾祖邦漢護軍祖順應著文行考廷表鄉邦稱孝友妣光山金氏父始澤金氏擧五子恒復尙復允復周復公其季也公生  純祖壬午天禀孝友彝性節儉又不廢餘力之學  哲宗庚申登庭試文科授成均學正疊遭考妣憂盡其情文服闋遷學諭學祿轉奉常奉事至成均博士仍卒于京卽  高宗丙寅也葬再遷於谷城竹谷面堂洞左壬原夫人平澤林氏宗漢女有婦德後公圽別葬谷城梧谷面明山村案山未坐二男長欽明出繼伯父次堯明三女適蘇秉星李敎勝蘇秉式金公漢鼎公同鄉客館皐復實其周章而狀行亦出其手其言宜可以徵信從孫瑩奉奉以走寒泉寓舍求爲銘瑩奉蓋曾年挾書從我遊者其請不可孤銘曰

侍講經筵公孤輔弼左右大官濟濟秩秩噤無一言陳戒公獨古有聖王不邇聲色以致治平眇然散班敢效啓沃風儀可觀由此則興不由則亂及今可徵立朝未久嘉謨莫究今則無有大者如此小者可推我銘以是

  歲乙巳維夏    幸州奇宇萬撰

 

박사공의 묘갈명

공이 성균관 박사로 주상(主上)을 모시고 상서(尙書:서경(書經)을 말함) 강하는데 「오직 왕께서는 성색(聲色:가성(歌聲)과 미색(美色))을 가까이 마소서[惟王不邇聲色]」이라는 문귀에 이르러 머리를 조아리어 절을 하고 가로되 「이것은 성주(聖主)께옵서 마땅히 체념(軆念)할 바이옵니다.」 하였다. 대개 이 때 주상의 연세가 바야흐로 유충(幼冲)하사여 성색에 유혹되기가 쉬운 고로 급하게 이것으로 진계(進戒:임금을 경계하는 것)하였다.

아! 세대를 지내오면서 인주(人主)가 몸을 망치고 나라를 상실하는 것이 이것에 말미암지 아니한 것이 있지 않으니 공의 이 한 마디 말씀은 진실로 진절(眞切)한 약석(藥石)이니 공으로 하여금 조정에 오랫동안 있었다면 마땅히 인군을 계옥(啓沃)한 것이 많았을 것인데 아깝게도 수를 하지 못하였다. 또 일찍이 동료(同僚)들과 더불어 말씀하기를 「정부자(程夫子:송(宋)나라 유학자(儒學者) 정이(程頤)를 말한 것)가 이르기를 일명지사(一命之士:임금의 명(命)을 받고 처음으로 벼슬하는 선비)가 진실 애물(愛物)에 마음을 둔다면 사람에게 유익하게 할 것이 반드시 있을 것이니 우리들이 어찌 직품이 적다는 것으로 어찌 소홀하게 하겠는가.」 하였다. 무릇 사람이 말을 아니할지언정 말을 하면 반드시 옳은 말을 할 것이니 이것으로 상상한다면 공은 즉 몸을 바르게 하고 임군을 섬기어 몸을 닦아 벗에게 믿음을 주는 분이로다. 공의 휘는 창복(昌復)이요 자는 명서(明瑞)이며 진씨(晉氏)로서 남원인이니 고려 때 복야 함조(含祚)가 그 시조이다. 시어사 광인(光仁)이 남원군 석(錫)을 낳아 거란을 토벌하고 승리하여 고려시대 원훈(元勳)이 되어 대대로 관직이 이어졌다. 학사 우란(于蘭)이 고려의 운명이 장차 마치게 될 것을 보고 두류산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는데 아조(我朝)에서 증명(徵命:임금이 부른다는 것)이 여러 번 이르렀으나 능히 일어나지 아니하였다. 이 분이 낳은 망송당(望松堂) 호로(虎老)는 능히 아버님의 뜻을 지키었으니 세상에서 말하는 두문동(杜門洞:경기도 개풍군 광덕면(京畿道開豊郡光德面) 광덕산(光德山) 서쪽 기슭에 있음. 여기서는 문덕봉하(文德峯下) 시전동(柿田洞)으로 지금의 남원군 대강면 송내리(南原郡帶江面松內里)를 말함)이 즉 그의 거주지이다. 대대로 관음(官蔭)이 있어서 증조 방한(邦漢)은 호군이요 조부 순응(順應)은 문행이 드러났으며 아버님 정표(廷表)는 향방(鄉邦)에서 효우로 칭도하였고 어머님 광산김씨는 친정아버님이 시택(始澤)이다. 김씨가 다섯 아들을 두었으니 항복(恒復), 상복(尙復), 윤복(允復), 주복(周復)인데 공은 그의 끝에 아드님이다. 공이 순조(純祖) 임오(단기 4155)년에 출생하였는데 천품이 효도와 우애가 있고 이성(彝性)이 절조 있고 검소하며 또 나머지 힘으로 학업을 폐기하지 아니하여 철종(哲宗) 경신년에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올라 성균학정에 제수되었는데 고비상(考妣喪)을 거듭 만나 그 애정(哀情)과 예문(禮文)을 다 하였고 상복을 벗은 뒤에 학유(學諭)와 학록에 직책을 옮기었다가 봉상시 봉사로 전직되어 성균관 박사에 이르렀다. 인해 서울에서 돌아가시니 즉 고종 병인년이다. 장지는 두 번째로 곡성군 죽곡면 당동(堂洞) 임좌로 된 언덕에 천장(遷葬)하였다. 부인 평택 임씨(林氏)는 종한(宗漢)의 따님이니 부덕이 있었고 공보다 뒤에 돌아가 곡성 오곡면(梧谷面) 명산촌 안산(案山) 미좌에 별도로 장례 모시었다. 2남 3녀를 두었는데 장남 흠명(欽明)은 백부에게 출계하였고 차남은 요명(堯明)이며 3녀는 소병성(蘇秉星)과 이교승(李敎勝)과 소병식(蘇秉式)에게 출가하였다. 김공 한정(漢鼎)은 공과 동향사람이다. 객관에서 고복(皐復:혼을 부르고 소쇄를 걷음)하는 것은 실은 그가 주장하였고 장행(狀行)도 또한 그 손에서 나왔으니 그 말을 마땅히 증거로 믿을 것이다. 종손(從孫) 영봉(瑩奉)이 행장을 받들고 한천우사(寒泉寓舍)로 와서 명(銘)을 구하였다. 영봉은 일찍이 책을 끼고 나를 좇아 배운 자이므로 그 청을 가히 외롭게 할 수가 없었다. 명하여 가로되

 

경연(經筵)에서 주상(主上)을 모시고 공고(公孤:대공(大公)이란 말)와 같이 보필하였지

좌우에 모시고 있는 대관(大官)들은 그 품질(品秩)이 엄숙하였네

입을 다물고 한 마디도 없었는데 공이 홀로 계언(戒言)을 진달하기를

옛날 성왕(聖王)에 있어서는 간성(奸聲)과 미색을 멀리 했다고 하시었지

치국평천하를 이루게 한 것은 묘연(眇然)한 산반에 있는 분이로세

감히 임금을 계옥(啓沃)하였으니 그 풍의(風儀)가 가히 볼만 하누나.

이것을 말미암으면 흥하고 말미암지 않으면 나라가 어지러워지나니

지금 와서 가히 징신(徵信)할 것이나 입조(立朝)를 오래하지 못했도다.

가모(嘉謨)를 마치지 못하여 지금은 다 없어졌네

큰 것이 이 같으시니 소절은 가히 미루어 알 수 있도다.

내가 이것으로 명을 하노라.

 

  을사(1905)년 여름에

    행주 기우만(奇宇萬)은 찬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