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

 

德川公墓碣銘 덕천공 묘갈명

 

余幼時嘗受業于南原晉進士晩翠先生余之今日粗有所解者先生之力爲多歲己亥先生謝世後八年其子炳宇抱其曾祖行狀來謁墓銘曰是吾先君之素志也宗孫慶夏方且立石敬以請顧余不文念疇昔有不忍辭者謹按狀公諱翼明字光之號德川祖貫南原以高麗戶部尙書左僕射謚文敬諱含祚爲鼻祖後有諱光仁殿中侍御史是生諱錫  高宗朝討契丹有功封南原君事載麗史及金慕齋集伊後圭組蟬聯  有諱如蘭宣德郞珍原監務於公爲十二代祖五傳而有諱起福  宣陵叅奉又再傳而有諱耈卿寔公高祖也曾祖諱禧周祖諱邦直考諱伯圭妣南原梁氏士人碩徽女公以  正宗庚寅十月六日生自齠齡器識異凡進退周旋灑掃應對皆有度如成人性至孝侍親膳寝整衣拱手洞洞屬屬雖隆寒盛暑未嘗少懈待宗族鄰里極其誠敬人咸歎其夙就年十八丁父憂號泣幾滅性殮殯祭奠悉遵禮制後丁母憂一如前喪時平生善推己恕人躬行純篤開牖後生晩年築精舍于修德峯下蓼川之上扁其室曰德川幅巾杖屨優遊自適有故舊來訪輒携手登臨逍遙竟晷時咏陶淵明歸去來辭人謂之晉處士以公姓諱與靖節有相同也或有勸仕則曰吾行善以敎子孫可矣不欲以名利導之也聞者益賢之以丙午五月十五日考終于德川精舍享年七十七葬于本郡大谷坊長嶝負庚之原配咸陽吳氏父慶泰工曹叅判胤祖七代孫後公十二年卒葬同崗酉坐有二子二女長璣玄副護軍次璣文女適盧璋壽尹璋錫通德郞璣玄男東旭啓旭女適安檜烈金漢鼎文科開城經歷李汀玉張悸璣文男昌旭進士卽先生也台旭定旭京旭儹旭女適鄭昌謨銘曰

力行孝悌寔由天彝芥視名利以訓諸兒德岑峨峨蓼水淸漪幅巾逍遙超然自怡鄉里慕效俗易風移我想其人邈若軒羲表碣于隧刻此銘詩惟後之人柯則是宜

  歲乙巳四月上澣    通政大夫前行秘書院承完山李範世撰

    通政大夫行承政院右副承旨兼經筵叅贊官春秋館修撰官東萊鄭翰謨書

 

덕천공의 묘갈명

내가 어릴 때 남원 진(晉) 진사 만취(晚翠) 선생에게 수업(受業)을 해서 내가 지금 조금 아는 바가 있는 것은 선생의 힘이 많은 것이다. 세차(歲次) 기해년 선생이 세상을 뜨신 후 8년에 그의 아들 병우(炳宇)가 그 증조의 행장을 안고 와서 묘갈명을 청하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우리 선군(先君)의 소지(素志:본래 가진 뜻)이다. 종손(宗孫) 경하(慶夏)가 바야흐로 비석을 세우려고 공경히 글을 청한다.」고 하였다. 돌이켜 보건대 내가 글을 못하나 옛날을 생각하니 차마 사양하지 못할 것이 있었다. 삼가 행장을 살펴보니 공의 휘는 익명(翼明)이요 자는 광지(光之)며 호는 덕천(德川)이니 조관(祖貫:관향이란 말)은 남원인데 고려 호부상서 좌복야 시호 문경 휘 함조(含祚)로 시조를 하였다. 휘 광인(光仁)이라는 분이 있으니 전중시어사요 이 분이 낳은 휘 석(錫)은 고종조(高宗朝) 때 거란을 토벌하여 공훈이 있어 남원군을 봉하였으니 이 사적이 고려사와 김모재집(金慕齋集)에 실려 있다. 그 뒤로 관직이 연속되어 휘 여란(如蘭)이라는 분이 있어서 선덕랑으로 진원감무를 하였으니 공에게 12대조가 된다. 5대를 전하여 휘 기복(起福)이라는 분이 있는데 선릉참봉을 하였고 또 2대를 전하여 휘 구경(耈卿)이라는 분이 있으니 이 분이 공의 고조이다. 증조의 휘는 희주(禧周)요 조부의 휘는 방직(邦直)이며 아버님의 휘는 백규(伯圭)이고 어머님은 남원 양씨(梁氏)니 사인(士人) 석휘(碩徽)의 따님이다. 공이 정종(正宗) 경인 10월 6일에 출생하여 7, 8세로부터 기식(器識)이 범인(凡人:보통사람)과 달라 진퇴주선(進退周旋)과 쇄소응대(灑掃應對)에 있어서 다 법도가 있어 성인(成人)과 같았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어버이를 모시는데 선침(膳寢)을 몸소 살피며 옷을 바르게 하고 손을 곶어 동동속속(洞洞屬屬:부지런히 하는 것)하여 비록 혹독한 추위와 무서운 더위라도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종족과 이웃을 대우하는데 있어서 그 정성과 공경을 지극히 하니 사람들이 그의 일찍이 성취된 것을 다 감탄하였다. 연세 18에 부친상을 만나 부르짖어 울기를 지극히 하여 거의 멸성(滅性:성명(性命)이 멸한다는 것) 되기에 이르렀고 염(殮)과 빈(殯)과 제(祭)와 전(奠)을 다 예제(禮制)를 준행하였다. 뒤에 어머님 상을 만나서도 일체 전상(前喪:아버님喪)과 같이하였다. 평생에 몸을 미루워 사람을 용서하기를 잘하고 몸소 행하기를 순수하고 독실하게 하여 후생을 개유(開牖)하였다. 만년에 수덕봉(修德峯) 아래에 있는 요천(蓼川) 위에 정사를 건축하고 그 실(室)의 편액(扁額)을 덕천(德川)이라고 하여 복건 쓰고 지팡이와 나막신으로 편안하고 한가롭게 구애됨이 없이 마음 내키는 대로 지내면서 옛 친구가 와서 찾는 사람이 있으면 문득 손을 이끌고 올라가 거니면서 날을 지내고 때로는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읊으니 사람들이 진처사(晉處士)라고 일렀는데 공의 성(姓)과 휘가 정절(靖節)로 더불어 서로 같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혹이 벼슬하라고 권한즉 말씀하기를 「내가 착한 일을 행하여 자손을 가르치는 것이 옳은 것이니 명리(名利)로 인도하고자 아니한다.」고 하여 듣는 사람이 더욱 어질게 여기었다. 병오년 5월 15일에 덕천정사에서 고종(考終)하시니 향년이 77이다. 본군(本郡) 대곡방 장등(長嶝) 경방(庚方)을 등진 언덕에 장례 모시었다. 배위는 함양 오씨(吳氏)니 아버님은 경태(慶泰)이고 공조참판 윤조(胤祖)의 7대손이다. 공보다 12년 뒤에 돌아가 같은 언덕 유좌(酉坐)에 장례 모시었다. 2자 2녀가 있으니 장남 기현(璣玄)은 부호군이고 차남은 기문(璣文)이며 2녀는 노장수(盧璋壽)와 윤장석(尹璋錫) 통덕랑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기현의 아들은 동욱(東旭), 계욱(啓旭)이요, 딸은 안회렬(安檜烈)과 김한정(金漢鼎) 문과로 개성 경력과 이정옥(李汀玉)과 장진(張悸)에게 출가하였다. 기문의 아들 창욱(昌旭)은 진사니 즉 선생이요 태욱(台旭)과 정욱(定旭)과 경욱(京旭)과 찬욱(儹旭)이며 딸은 정창모(鄭昌謨)에게로 출가하였다. 명하여 가로대

 

효제(孝悌)를 힘써 행하셨으니 이것은 천이(天彝)를 말미암은 것이지

명예와 이익을 초개(草芥)같이 보아 모든 자질을 교회(敎誨)하시었네

수덕잠은 높이 솟아있고 요천수(蓼川水)는 맑고 아름답구나.

복건(幅巾)으로 한가로이 소요(逍遙)하며 초연히 기뻐하누나.

향리(鄉里)에서는 사모하여 본받고 세속에서는 풍습을 바꾸어 옮기었네

내가 그 분의 인품을 생각하니 아득한 저 헌원(軒轅) 씨 복희(伏羲) 씨로세

묘전(墓前)에 갈석(碣石)을 표식(表植)하여 이 명시(銘詩)를 새겨놓으니

오직 후세 사람들이 이 어른으로 법측을 하는 것이 마땅하리

 

  을사(1905)년 4월 상순에

    통정대부 전행 비서원승 완산 이범세(李範世)는 찬술하고

    통정대부 행 승정원 우부승지 겸 경연 참찬관 춘추관 수찬관

    동래 정한모(鄭翰謨)는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