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

 

判公墓碣銘(幷序) 참판공 묘갈명(병서)

 

公諱壽鳳字周瑞號春湖其世德源委載修軒公碣公以甲午三月七日生天資甚美自孩提時顧眄凝重嬉獻不凡年未齠齔愛養父母惟以悅志爲務及就學俛首勤讀不煩敎督以字義解句義以句義解章義未幾文理大進成童經史子集無不涉獲而篤愛小學書以爲做人樣子無出於此爲士者豈可一日捨此嘗曰堯舜聖人也堯舜之所以爲堯舜豈別有他道亦惟曰孝弟而己考修軒公每稱之曰吾有孝順子何願富貴在身旣而連遭內外艱以葬地未完權厝于先塋側仍廬于墓下哀毁成柴幾不自支一日歸家虎當道若向人有所指狀公隨虎所之虎之一處以足爬地良久而去異之遂奉窆于其地如成侍中古事也堪輿者皆謂吉壤夫虎者孝獸也氣類相感之理有如此矣年逾七旬孺慕不衰語及父母必泫然如有所失壽  除嘉善大夫戶曹叅判追榮三世乙巳十二月二十七日觀化于正寝得年七十二也蓋公丕襲前光自治嚴密雌黃不設於口喜慍不形於色溫和樂易不露畦畛其惠人利物之善蹟無非可述而槩而言之一是孝之推也房下子孫無宴安岐徑之誘有處善順理之樂者一是公積蔭所曁也仁者其壽善必有慶其是之謂歟衣履之藏在南原東波五柳洞丑坐原配貞夫人金海金氏祔右有四男長時協無嗣次時和次時泰次時文時和四男成仁成義成禮成智曾玄以下不盡錄七世孫承鐸漢鐸珠鐸完鐸將改竪石袖公遺事及趙承旨善九所撰狀要余銘之其言可以徵信强拭昏翳撫其大略如上銘曰

生有異質居安立疑孝根于天克感庶物仁而得壽秩躋嘉善宜其有後福祿遝荐

  柔兆困敦復月下浣  蔚山金定中謹撰

 

참판공 묘갈명(병서)

공의 휘는 수봉(壽鳳)이요 자는 주서(周瑞)이며 호는 춘호(春湖)이니 그 세덕(世德)의 원위(源委)는 수헌공 묘갈(墓碣)에 실려 있다. 갑오년 3월 7일에 공이 출생하니 타고난 자품이 심히 아름다워 해제(孩提:손 붙잡고 다니는 아이) 때부터 돌아다보는 태도가 잉중(凝重)하고 희롱하고 노는 것이 불범(不凡)하였으며 나이가 이를 갈 나이가 아니되었는데도 부모를 애양(愛養)하여 오직 뜻을 기쁘게 하여 드리는 것으로 힘썼다. 배움에 나가서는 머리를 숙이고 부지런히 읽어 교독(敎督:가르쳐 독촉하는 것)을 번거롭게 하지 않았다. 자의(字義:글자의 뜻이란 말)로 귀의(句義:귀절의 뜻)를 풀고 귀의로 장의(章義)를 해석하여 얼마 되지 않아 문리(文理)가 크게 진취되었다.

성동(成童)이 되어 경사자집(經史子集)을 섭렵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소학서(小學書)를 독실하게 사랑하여 말하기를 「사람의 모양을 만드는 것은 이것보다 나은 것이 없으니 선비가 된 자 어찌 가히 하루라도 이 책을 놓으리요.」라고 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요순(堯舜)이 요순으로 된 것이 어찌 특별히 다른 길이 있겠는가. 역시 오직 효제(孝悌)일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그의 아버님 수헌공(修軒公)이 매양 칭찬하여 말하기를 「내가 효순(孝順)한 자식이 있으니 어찌 부귀가 몸에 있기를 원하리요.」라고 하였다. 뒷날 내간상과 외간상을 연속 만났는데 장지(葬地)가 완전하지 못한 것으로 인하여 선영(先塋) 곁에 권조(權厝)를 하고 인해 묘하 여막(廬幕)에 있으면서 애훼(哀毀)하여 시(柴)나무같이 말라 스스로 지탱하지 못하게 되었다. 하루는 집으로 돌아가는데 호랑이가 길을 막고 사람을 향하여 무엇을 가리키는 모양을 하였다. 공이 호랑이가 가는 곳을 따라갔다. 호랑이가 한 곳을 가더니 발로 땅을 긁고 한참 있다가 갔다. 공이 이상히 여기고 드디어 그 땅에 봉폄(奉窆)하니 성시중(成侍中)의 옛일같이 되어서 지리학자가 다 길지(吉地)라고 일렀다. 무릇 호랑이라는 것은 효성이 있는 짐승이므로 같은 기운이 서로 감동되는 이치가 있는 것이 이러하다. 연세가 70이 넘었는데도 어버이를 사모하는 정성이 쇠하지 아니하여 부모에게 말이 미치면 반드시 눈물을 흘리어 실심(失心)하는 바가 있는 것 같았다. 수직으로 가선대부 호조참판을 제수하고 3대를 추증하였다. 을사년 12월 27일에 정침(正寝)에서 돌아가시니 72의 수를 얻었다. 대개 공이 전광(前光)을 크게 승습(承襲)하고 스스로 몸 다스리기를 엄밀히 하였으며 시비를 입에 담지 아니하고 희온(喜慍:기뻐하고 성내는 것)을 안색에 드러내지 아니하며 온화하고 락이(樂易)하여 모지고 까다로운 것이 드러나지 아니하였다. 그 혜인이물(惠人利物)하는 착한 사적은 가히 저술하지 아니할 것이 없는데 대개(大槩)를 말한다면 하나같이 효를 미루어 된 것이다. 방하자손(房下子孫)이 연안기경(宴安岐逕:안일한 행락과 잡된 길)의 유혹됨이 없고 처선순리(處善順理:착한데 처하여 이치에 순응함)의 즐거움이 있는 것은 하나같이 이것은 공의 음덕을 쌓은 소치이니 어진 자는 그 수를 하고 착한 자는 반드시 경사가 있다는 말은 이를 이룬 것이로다. 의리지장(衣履之藏:묘소를 말한 것)은 남원 동파 오류동 축좌원(丑坐原)에 있고 배위 정부인 김해김씨를 우(右)에 부장(祔葬)하였다. 4남을 두었는데 장남 시협(時協)은 자식이 없고 차남은 시화(時和)요 3남은 시태(時泰)이며 4남은 시문(時文)이고 시화의 4남은 성인(成仁), 성의(成義), 성례(成禮), 성지(成智)니 증현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아니한다. 7대손 승탁(承鐸), 한탁(漢鐸), 주탁(珠鐸), 완탁(完鐸)이 장차 비석을 고쳐 세우려고 공의 유사(遺事)와 조승지 선구(善九)가 찬술한 가장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묘갈명을 요구하였다. 그 말씀이 가히 증신(徵信)할만 하므로 어두운 눈을 비벼가면서 그 대략을 위와 같이 서술하고 명하여 가로되

 

나면서부터 특이한 자품이 있어 앉으면 편안하고 서면 엄연하였지

효도는 하늘에서 타고나서 능히 모든 서물(庶物)을 감화(感化)시켜 주었네

어짊으로 해서 수를 얻어 품질이 가선(嘉善)에 오르셨구나

마땅히 후손(後孫)이 번창하여 그 복록이 또한 거듭되리로다.

 

  병자(1936)년 11월 하순에

    울산 김정중(金定中)은 삼가 찬술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