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

 

永慕齋記 영모재기

 

墟墓未施哀而民哀况先世邱壠軆魄冠屨之所藏則後孫登降躑躅其有不思慕者乎我修軒府君得於己而有孝悌之實行於家而有勤儉之規可以垂諸來裔而儲毓於久遠矣子孫之齕穀飮水戴縱垂纓何莫非府君勤刻之餘蔭而墓下久無齋薦之一室先行用是爲慨謀慮經始者屢矣琑尾孱孫力弱而未遂矣歲在甲戌始克經營爲築四架中二間爲聽事習禮之所東一間爲聚族講睦之所西一間爲薦享籩型之所正門三間而周圍혈屋東西爲階左右欄檻於是位置井井規格班班燁然有可觀焉將落也諸族咸聚於齋內置酒相樂有起而語者曰累世未遑之事及今而成之可以無餘憾矣然人家盛衰由於本領之守不守本領則安在孝弟是也惟願吾南晉母以齋室之完成爲吾事己了父敎其子兄勉其弟無念乎外無怠於內以湥軆府君之實德而益修德焉可謂不忝所生而家聲庶乎其不替矣諸族皆歛袵曰是不可以不之書也

  庚辰三月日    七世孫鍾斗謹記

 

영모재 기문

허묘(墟墓:풀 속에 묻힌 제사 지내는 사람이 없는 무덤이니 즉 묵묘이다)에는 슬픈 제사를 시행하지 아니해도 백성이 슬퍼하거든 하물며 선대의 무덤은 체백(軆魄)과 관구(冠屨)를 모신 곳으로서 후손이 오르내리면서 머뭇거리나니 그 어찌 사모(思慕)하지 아니하는 자가 있겠는가. 우리 수헌부군(修軒府君)이 몸에 얻으신 것은 효제의 실행이 있고 가정에서 행하신 것에는 근검(勤儉)한 규칙이 있어서 가히 모든 후손에게 전하여 복을 구원(久遠)하게 저축하여 주시었다. 곡식을 먹고 물을 마시며 관을 쓰고 갓끈을 느리는 것 모든 것이 어찌 부군의 근각(勤刻)하시던 여음(餘蔭)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묘하에 오랫동안 재천지일실(齋薦之一室)이 없어서 선행(先行:선인(先人)이란 말이니 항렬이 높은 선인(先人)들이란 말이다)이 이것을 개탄하시어 생각하고 경영한지가 여러 번이었으나 미약한 잔손(孱孫)들이 힘이 약해서 이루지 못하였다. 세차(歲次) 갑술년에 비로소 능히 경영을 해서 사가(四架)를 건축하였으니 이간(二間)이 청사(聽事:마루)이니 예를 강습하는 장소이고 동일간(東一間)은 종족이 모이어 화목을 강구하는 곳이며 서일간(西一間)은 천향(薦享)에 제기를 정리하는 곳이고 정문(正門)이 3간인데 주위는 담장을 쳤으며 동서로 뜰을 만들었고 좌우로 난간이 있어서 이에 위치가 정정(井井)하고 규격이 반반(班班)하여 가히 볼만하다. 장차 낙성식을 하는데 모든 겨레가 재실 안에 다 모이어 술을 설치하고 서로 즐기었다. 일어나 말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가로대 「여러 대 겨를하지 못하였던 일을 오늘에 와서야 성취하였으니 가히 여감(餘憾)이 없게 되었다. 그러나 사람의 집이 성하고 쇠하는 것은 본령(本領)을 지키고 지키지 못하는데서 말미암는 것이니 본령은 무엇인가 하면 바로 효제가 그것이다. 오직 원하노니 우리 남원진씨는 이 재실이 완성되었다는 것으로 나의 일을 다 마치었다 하지 말고 아버지는 그 자식을 교도하고 형은 그 아우를 권면하여 외화(外華)를 생각하지 말고 내행(內行)을 게을리하지 말라. 부군의 실덕(實德)을 깊이 본받아 더욱 덕을 닦는다면 가히 나를 낳으신 분을 더럽히지 않았다고 할 것이니 우리 가문의 명성이 거의 시들지 아니할 것이다.」 하니 모든 종족이 다 옷깃을 거두면서 말하기를 이 말씀은 가히 글로 쓰지 아니하면 안 되겠다고 하였다.

  경진(1940)년 3월 일에

    7世孫 종두(鍾斗)는 삼가 기록함